독립출판물 <깍두기> 제작기 #03. 편집 (1)
절대로 붙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출판사라고는 하는데 실제로 세상에 내놓은 책은 딱 한 권. 나머지 하나는 올해에 내겠다고 떵떵거리기는 했지만 아직 표지 이미지조차 나오지 않았고. 어느 북페어가, 그것도 서울퍼블리셔스테이블처럼 경쟁이 치열한 행사가 나에게 부스 1개를 통째로 내어주겠는가. 합격할 기대가 없었어서 그런가 지원서를 적으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되면 되는 거고, 안 되면 참가비도 굳고 좋지 뭐.
북페어가 낯선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보태자면, 나처럼 책을 만든 창작자나 출판사들이 모여서 부스를 차리고 책을 파는 행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국제도서전처럼 메이저 출판사들이 널찍한 부스를 차리는 행사도 있지만, 소위 말하는 '독립출판물'로 분류되는 책을 위한 독립출판 북페어도 많이 열린다. (물론 전자에도 n권 이상의 작품을 출간한 소형, 1인 출판사도 참가 가능했지만 독립출판 북페어처럼 그런 책'만'을 위한 행사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물론 혼자서 단독 부스를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지만, 나처럼 출간한 책의 종류가 많지 않은 경우에는 덜렁 혼자서 참가 신청을 하는 게 좀 불리할 수 있다. 행사 공간은 한정적이니 그 안에서 판매되는 상품의 종류가 최대한 다채로워야, 관람객 입장에서 볼거리가 풍성해서 그런 걸까? 아무튼 일부 행사는 나처럼 1, 2권의 책만 만든 창작자들은 다른 창작자들과 팀을 이루어 신청하거나, 1개의 부스를 반으로 지른 0.5 부스를 신청하라고 권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작년에 열린 서울퍼블리셔스테이블에는 총 8명인가 9명(!)이 이룬 팀에 끼어들어가서 겨우 합격을 했었다. 반면 올해에 단독 참가를 신청했던 언리미티드북페어는 광탈했고.
그럼에도 내가 서울퍼블리셔스테이블에 출판사 단독 명의로 과감히 1개 부스를 신청한 이유는, 전술했던 것처럼 어차피 0.5개 부스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이왕 지를 거면 크게 지르자는 마음도 있었고(대책 없이 사는 편) 한편으로는 신간 홍보를 제대로 해려면 작가님을 꼭 모셔야 하므로, 의자를 1개밖에 주지 않는 0.5 부스는 합격을 하더라도 큰 메리트가 없었다. 28만 원이라는 참가비를 보고 손이 좀 떨렸지만... 아무튼 그렇게 2023년 7월, 1개 부스를 신청하고 기분 좋게 마음을 내려놓았다. 언리미티드처럼 또 광탈하겠지? 그럼 뭐 연말까지 <깍두기> 작업에만 집중하고 좋지 뭐.
그렇게 나를 떨어뜨릴 거라고 간절하게(?) 믿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10월 중순까지 <깍두기> 인쇄까지 마쳐야 한다. 합격 발표가 난 건 8월 중순. 내게 남은 시간은 약 8주, 그런데 추석 연휴가 거의 일주일이었고 그거 때문에 분명 평소보다 인쇄 일정이 밀릴 테니 표지랑 내지를 연휴 전에는 완성해야 할 거고...
그럼 편집부터 번역, 디자인까지 6주 안에 완성해야 하네?
그것도 혼자서?
난 그다지 긍정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이런 상당히 난감한 상황 속에서 최대한 교훈 비슷한 걸 뽑아보자면... 차라리 이렇게 빡빡한 데드라인이 주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인쇄를 맡기고 한 3일 정도 내리 잔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어쩌면 연말까지 책을 완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촉박한 시간 말고도 나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두려움이었다.
작년에 첫 번째 책인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을 만들었을 때에는 두렵지 않았다. 당연하지. 두려워야 할 대상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땐 그냥 마냥 다 재밌었고, 잘 모르거나 자신이 없는 부분은 가볍게 건너뛰고(<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의 표지, 내지 디자인이 사실상 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미니멀한 이유가 여기에 있음), 많이 팔리거나 입고가 되지 않더라도 그냥 도전에 의의를 둬야겠다는 막연한 마음이었다.
근데 그런 마음으로 만든 책이 생각보다 잘 되어서 3개월 만에 500부가 모두 내 손을 떠나고, 신나서 중쇄를 1000부를 찍고 물류창고도 계약했다. 이때가 딱 책 만들어서 신이 났던 기분의 절정이었다.
연애도 딱 100일 정도까지가 가장 간질거리고 설렌다는데 책도 마찬가지인 건가. 중쇄를 후회하기까지는 그 뒤로 100일도 걸리지 않았다. 내 책은 신간을 위해 마련된, 잘 보이는 매대에서 밀려나 벽면의 책꽂이에 수납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매출도 점점 떨어졌고 재입고를 받지 않겠다는 서점도 처음으로 생겼다.
500부와 1000부 인쇄 간의 가격 차이가 겨우 20만 원 수준이라 후자를 선택했던 건데, 속도가 조금 느려지더라도 어쨌든 계속 팔리는 서점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 털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독립출판물의 판매 주기를 잘 모르던 초보가 품었던 지나친 희망이었다. 내 손으로 책을 만들었다는 처음의 짜릿함이 가신 후에 받아 든 현실이라서 그런가 몇 배 더 씁쓸했다. 출간으로부터 1년이 조금 넘은 지금도 창고에 쌓여있는 재고를 어찌해야 할지, 이제부터는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 유통을 해야 할지 아직도 고민 중이다. (사족: 물론 아직 입고된 거의 대부분 서점에서는 계속 팔리고 있으니 '어 이제 서점에서 책을 못 사는 건가?'하고 오해는 마시길. 꾸준히 찾아주시는 서점 사장님, 독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을 만들 때에는 그 뒤의 1년이 이렇게 펼쳐질 줄 꿈에도 몰랐다. 잘 모르니까 기대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오판으로 인한 재고 부담이 이렇게 클 줄도 몰랐다. 물론 시행착오를 통해서 전보다는 더 많은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미처 겪지 않은 시행착오가 아직 남아있으면 어떡하지?
이 모든 걸 아는 상황에서 <깍두기>를 만드는 나의 마음은, 첫 번째 책을 기획하며 한껏 들뜨기만 했던 1년 반 전의 나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족의 글이라지만 타인의 원고를, 그것도 나의 번역을 한 번 거쳐서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을 가중했다. 아니, 오히려 가족이라서 내 책보다도 더 잘하고 싶었다. 전주책쾌에서 돌아와 팔짝팔짝 박수를 치며 빨리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신나 하던 네일기 작가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작가님이 나의 가족이라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런 고민까지 소상히 털어놓고 나눌 수 있었다는 것. 일적으로 만난 사이라면 내게 돈보다도 더 귀한 원고를 맡긴 사람에게 자신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하찮은 고민을 들고 와도 다 받아주는 네일기 작가님 겸 나의 남편은 이런 아마추어의 쭈그렁한 걱정까지 모두 품어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다독여주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첫 책을 만드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건 맞는 말이다. 이 길이 아무리 고생길이라도, 어, 내가 그래도 명색이 출판사 대표인데 남편의 첫 책을 남이 만드는 건 두 눈 똑바로 뜨고 볼 수가 없단 말이지! (물론 그게 더 나은 책을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늦었다 ㅎ)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유능한 번역가보다도 남편의 목소리를 한국어로 잘 옮길 자신이 있었다. 그와 매일 대화를 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기에 그가 어떤 포인트에서 웃긴지, 그가 만약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게 된다면 어떤 말투를 쓸지 정확히 안다고 자신하니까.
아무튼 그렇게 편집자인 내가 작가 멘탈을 관리하는 것에 더해, 작가가 편집자를 응원하는 이상하면서도 상호호혜적인 모양이 완성되었다. 근데 이 글에서 편집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하나도 못했네. 본격적인 편집 과정과 방법 소개는 다음 글에서...!
-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깍두기>는 10월 말부터 전국 독립서점을 통해 판매할 예정입니다. (지역 서점과의 상생을 위해 개인 통신판매, 대형/온라인 서점에서 유통할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서점에 입점하기에 앞서, 인쇄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먼저 예약 판매를 진행합니다. 독립 창작자와 1인 출판사의 작은 목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책을 예약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깍두기> 예약 판매 주문하기 (~2023. 10. 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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