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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Apr 15. 2023

고무신을 거꾸로(2)

카바레

  이래도 되는 건가 하면서도 장바구니를 든 은희의 발걸음은 카바레로 향했다. 홀 안으로 들어서자 떠나갈 듯 터져 나오는 음악 소리, 눈이 시리게 난무하는 오색 불빛, 그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돌아가는 남녀들, 환상적인 광경이 여전했다.     


  먼저 와 있던 춘자가 그녀를 멋쩍게 맞이했다. 대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익숙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에 춘자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헤집고 다니며 몸풀기 바빴다.     


  대상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디스코, 블루스, 지르박이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벌 나비가 은희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모두 하찮은 남자들뿐. 한 스텝을 밟고 나면 그만 심드렁해졌다. 춘자도 파트너를 바꿔가며 기분을 내려 하지만 별로 신나 보이지 않았다.      


  두 여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녁이 다 되도록 대상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늘은 오지 않나 봐.”

  은희가 아쉬움을 흘렸다.

  “그런가 보네. 오늘 저녁으로 한정식은 허탕이다.”

  춘자가 핸드백을 어깨에 걸쳤다.      


  다음 날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 그다음 날도. 4일째, 5일째··· 마찬가지였다. 그를 만나서 어쩌자는 건가 하면서도, 은희는 학생이 학교 가듯 착실히 카바레에 출근했다.    

  

  점차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무역회사 사장님이, 주위에 내로라하는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나 같은 게 무슨 대수겠어. 은희라는 여자는 그냥 잠시 스쳐 간 존재에 불과할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렇게 여러 날 나타나지 않겠어. 날이 갈수록 의구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니, 여자의 육감은 못 속여. 그날 나를 보는 눈초리가 그렇게 말했잖아.··· 어쨌든 그를 만나야 해.

  그렇게 1주일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애를 태웠다. 그럴수록 그녀는 그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카바레에서는 그렇게 헛물을 켰지만, 밤이면 꿈속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밤새도록 그의 몸을 받으며 황홀경에 빠졌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팬츠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억제된 욕정은 깨어있을 때도 꿈속 장면을 끝없이 반추했다.




  열흘째 되던 날. 춘자는 일이 있다고 해 그녀 혼자 가서 앉았는데, 뜻밖에도 대상이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갑자기 일이 생겨 한동안 애를 먹었는데 잘 해결됐다며 밝게 웃었다. 그는 또 그녀 혼자 나오게 된 연유를 듣고, 훼방꾼이 없어졌으니 잘됐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지난번과 또 달라 보였다. 더 세련되고 더 부티가 났다.

  둘은 서로 손과 어깨를 내어주고 다정하게 스텝을 밟았다.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린 재회인가. 아련한 핑크빛 조명에 몸을 담그고, 감미로운 음악이 귀에 감기며, 한 쌍의 선남선녀가 꽃길을 거닐고, 창공의 구름 위를 날았다.

  어찌 이렇게 행복할 수가.···그들은 단지 두 번째 만남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전생부터 이어진 인연일 지도 몰랐다.   

  

  갈수록 그가 몸을 밀착해 옴에 따라, 오랫동안 남자의 손을 타지 않은 그녀의 육체는 속수무책으로 달아올랐다. 목마른 사슴처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내려다보는 눈길이 뜨거웠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지난 열흘 동안 내가 얼마나 은희 씨를 생각했는지 모를 겁니다. 일하면서도 머릿속은 은희 씨 생각으로 가득했죠. 아, 그 망할 놈의 일이 내 발길을 잡고 놔주질 않아서······.”

  꿈속인 듯 달콤한 음성이 속삭였다. 그녀의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했다. 얼굴이 후끈거리며 진땀이 났다. 무역회사 사장님이, 춘자가 그렇게 탐내는 남자가,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대상은 그녀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내 연기가 완벽했지. 그리 고통이 심하지도 않았는 데 있는 대로 엄살을 부렸더니, 이 어리숙한 여자는 그대로 믿었지.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심한 고통을 숨긴다며 감동했지. 지금은 거짓 고백에 저렇게 감격하지 않나. 먹잇감이 순진해서 작업이 간단하군. 이미 잡아 놓은 물고기나 다름없어.      


  대상의 검은 속셈을 알 리 없는 그녀는 믿기지 않는 그의 고백에 벅찬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리고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마찬가지였어요. 열흘 내내···정사장님이 눈앞에서 아른거렸죠.”

  말을 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하지만 기왕 엎질러진 물을 어이하랴.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부녀로서 그래서는 안 되지만, 더욱이 입 밖에 내서는 안 되지만··· 정사장님이 내 가슴을 흔드니 그만 속마음을 들키고 말았······.”

  순간 억센 팔이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뜨거운 입술이 입술을 덮었다.

  “오늘··· 이대로 보내드릴 수 없어요··· 무리한 요구인 줄 알지만··· 내 마음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하룻밤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뜨거웠던 꿈속 장면만 눈앞에 삼삼했다.

 ‘그래, 오늘 한 번만. 나와 저 사람만 알 뿐 아무도 모를 일이야.’

  모든 것을 그에게 내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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