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웃는 피해자’를 견디지 못하는가

당신의 미소는 죄가 아니다

by 강훈

비극을 겪은 당사자가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짓거나 일상의 평온을 되찾으려 할 때, 우리 내면에서는 기묘한 거부감이 고개를 든다. “아직 저럴 때가 아닐 텐데”, “정말 아픈 게 맞나?”라는 의심 섞인 수군거림이 공기를 채운다. 최근 드라마 <자백의 대가>에서 대중이 남편을 잃은 주인공을 살해 용의자로 몰아세웠던 결정적 이유도 그녀가 ‘미망인답지 않게’ 웃고 화사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피해자가 우리 기대만큼 충분히 망가지지 않았을 때, 마치 사기를 당한 관객처럼 분노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비참함’이다.


슬픔의 자격증: 고통에도 유니폼이 필요하다는 착각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피해자 등급표’가 존재한다. 그 등급을 결정하는 것은 가해자의 악행이 아니라, 피해자가 보여주는 ‘무력함의 강도’다. 스스로 일어서려고 노력하거나 당당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피해자는 대중의 눈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연기자’로 비치기 십상이다.

우리는 피해자가 영원히 캄캄한 방 안에 갇혀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들에게 ‘가여움’이라는 값싼 은혜를 베풀며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도 일종의 ‘자격증’이 필요하며, 그 갱신 조건은 여전한 비참함이어야 한다는 이 잔인한 룰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사회적 사형장이다.


타인의 고통: 관객이 된 대중의 잔인한 시선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그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현대인이 타인의 비극을 대하는 방식을 신랄하게 해부했다. 그녀는 고통이 이미지를 통해 전달될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음증적 구경꾼'이 된다고 경고했다.

손택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익숙해질수록, 그 고통이 우리가 정해놓은 '전형적인 비극의 이미지'와 다를 때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고 분석했다. <자백의 대가> 속 주인공의 미소가 논란이 된 것은, 그녀가 대중이 머릿속에 박제해 둔 '남편 잃은 여자'의 전형성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타인의 고통은 일종의 스펙터클(구경거리)이며, 피해자는 그 무대 위에서 정해진 대본대로 울어줘야 하는 배우로 전락한다. 우리가 외치는 공분은 사실 피해자를 향한 연대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내 마음대로 감상하고 단죄하며 얻는 비뚤어진 권력감의 분출이다.


주권적 배반: 당신들의 기대를 저버릴 의무

진정한 주권은 세상이 내게 맡긴 ‘피해자’라는 배역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일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억울한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나는 아프지만,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울지는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비극의 한복판에서도 내 삶의 고유한 색깔을 포기하지 않고, 타인의 연민에 기생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주권은 내 슬픔의 농도를 타인의 시선에 맞춰 조절하지 않는 배짱에서 나온다. 세상이 정해준 슬픔의 유니폼을 거부해야 한다. 비극을 겪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상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고, 욕망하며, 주체로 남는 것. 그것이 박제된 슬픔을 강요하는 사회를 향한 가장 서늘하고도 품격 있는 복수가 아닐까.


당신의 미소는 죄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그 사람이 ‘나의 위로를 받을만한 상태’인지를 먼저 가늠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의 표정이 내 생각보다 밝다는 이유로 건네려던 마음을 거부하며, 그가 더 불행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동시에 상처 입은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억지로 우울을 연기하지 마라. 당신의 미소는 죄가 아니며, 당신의 회복은 상처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함부로 규정하려는 세상의 무례함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타인의 기대가 아닌 오직 나의 감각이 이끄는 대로 표정을 짓는 것,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눈물을 증명할 의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