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은 높으나 사유는 빈곤한 자들
우리는 최고의 학벌을 가진 이들이 사회의 도덕적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하곤 한다. 하버드나 서울대 같은 최고 명문대라는 이름 뒤에는 지적 탁월함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품격과 책임감이 따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은 이 믿음을 산산조각 낸다. 정교한 논리로 타인을 압박하고, 자신의 성공을 오직 자신의 능력이라 믿으며, 법망을 피해 교묘하게 이익을 챙기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를 깊은 회의에 빠뜨린다.
지능(Intelligence)은 높지만 사유(Thinking)는 멈춰버린 상태. 이것이 오늘날 ‘성공한(?) 엘리트’들이 앓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자, 우리 사회가 마주한 실존적 위기의 본질이다.
기술적 지능과 도덕적 사유의 결별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나치의 전범 아이히만을 목격하며 ‘사유의 무능(Inability to think)’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은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똑똑한’ 관료였으나,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상상하는 능력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엘리트 교육은 아이히만과 같은 ‘기술적 천재’들을 양산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법을 해석하고, 경영 지표를 분석하며, 선거에서 승리하는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그러나 "내가 내린 이 결정이 누군가의 식탁을 무너뜨리지는 않는가?"를 묻는 도덕적 상상력은 그들의 평가 항목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능이 타인을 이기기 위한 도구로만 쓰일 때, 그 지능은 사회를 파괴하는 가장 정교한 흉기가 된다.
능력주의라는 종교: 운(Luck)을 실력으로 착각하는 오만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했듯, 엘리트들이 빠지는 가장 큰 함정은 자신의 성공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재능 덕분이라고 믿는 ‘능력주의의 오만’이다. 그들은 하버드나 서울대라는 성벽 안으로 들어온 순간, 그 길을 닦아준 수많은 이들의 조력과 시대적 운을 망각한다.
"나는 내 실력으로 이 자리에 왔으니, 내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타인에 대한 시혜적 태도를 넘어 멸시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성공하지 못한 대중은 단지 ‘능력이 부족한 루저’일 뿐이다. 이러한 오만은 공감을 마비시킨다. 자신이 누리는 특권이 우연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타인의 고통은 그저 '능력 부족의 결과'라는 차가운 인과론으로 치부될 뿐이다.
주권의 오남용: 권력은 있되 주체는 없다
진정한 주권은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넘어, 그 결정이 타인과 세상에 미칠 영향을 기꺼이 책임지는 자세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공부만 잘하는 기계로 길러진 엘리트들에게 주권은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권력’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시스템의 정점에 서 있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는 실패한 ‘소외된 승자들’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지위라는 감옥에 갇혀, 정작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격조차 계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주권은 타인 위에 군림하는 칼날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타인과 연대하는 따뜻한 그릇이어야 한다.
인간답게
엘리트들의 일탈을 보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학벌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사유하는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다. 아무리 화려한 학위를 가졌어도 타인의 아픔에 눈 감는 자는 지적으로는 성숙했을지 몰라도 인격적으로는 미성숙한 존재에 불과하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정보와 선택들 앞에서 잠시 멈추어 본다. 나는 지금 ‘똑똑하게’ 이익을 챙기려 하는가, 아니면 ‘인간답게’ 사유하려 하는가. 진정한 탁월함은 타인을 짓밟고 올라선 높이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의 손을 잡는 깊이에서 나온다. 성벽 위의 오만한 목소리들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정직한 언어로 정의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 각자의 실존적 주권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