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지 못하고 소유하는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 집은 영혼이 깃드는 안식처라기보다, 자산 가치로 환산되는 숫자들의 집합체에 가깝다. 어디에 사느냐가 곧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시대, 우리는 더 넓고 비싼 공간을 ‘소유’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지만 정작 그 안에서 평온하게 ‘머무는’ 법은 잊어버린 듯하다. 물리적인 벽은 견고해졌으나, 그 안을 채워야 할 삶의 향기와 개별적인 서사는 빈약해진, 바로 그 공간의 소외를 우리는 매일 마주하고 있다.
공간은 단순히 등기부등본상의 재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이 외부와 만나는 지점이자, 흐트러진 자아를 다시 추스르는 실존적 거점이어야 한다.
영혼의 요람: 보호받는 몽상의 공간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집을 ‘영혼의 요람’이자 ‘몽상의 공간’으로 정의했다. 그에게 집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물리적 건축물을 넘어, 인간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전 자신의 내면을 보호받고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최초의 우주와 같다.
어린 시절,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며 정착하지 못한 채 자라온 이들에게 집은 때로 불안의 발상지였을지도 모른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방, 언제든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공간을 정서적 영토가 아닌 임시 거처로 느끼게 만든다. 바슐라르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공간이 주는 ‘보호의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랍 하나, 구석진 모퉁이 하나에 나만의 기억과 사유를 심어둘 때, 그곳은 비로소 단순한 ‘부동산’에서 나의 ‘장소’로 거듭난다.
거주(Dwelling)와 소유(Possession)의 간극
우리는 집을 소유(Possession)하는 일에는 필사적이지만, 거주(Dwelling)하는 일에는 서툴다. 소유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경제적 행위이지만, 거주는 나의 실존을 공간 속에 뿌리내리는 존재론적 행위다. 화려한 가구와 비싼 인테리어로 채워진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나만의 리듬으로 숨 쉬지 못한다면 그곳은 거대한 쇼룸에 불과하다.
주권적인 삶을 사는 이는 공간의 크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머무는 작은 자리에 자신의 취향과 철학을 깃들게 함으로써 그 공간의 주인이 된다. 억지로 꾸며진 모델하우스 같은 삶이 아니라, 나의 손때가 묻고 나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공간이야말로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단단한 실존적 방벽이 된다. 공간을 소유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스템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거주자로 서게 된다.
장소의 회복: 내가 머무는 곳이 나다
진정한 주권은 내가 머무는 자리를 나의 영토로 선포하는 데서 완성된다. 그것은 집의 평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내가 머무는 공간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의 포근함, 낡은 책상이 주는 안정감, 나만이 아는 작은 소품들의 배치 등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들이 공간에 스며들 때 그곳은 비로소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장소가 된다.
우리는 이제 공간에 대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이 집의 가치가 얼마인가"가 아니라, "이 공간이 나의 영혼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불안정한 정착의 기억을 통과해 온 자일수록, 지금 발 딛고 선 이 자리를 더욱 정성껏 경작해야 한다. 공간은 나의 배경이 아니라 나의 확장된 신체이며, 그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곧 내 삶을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구석
집이 주는 물리적 안락함보다 정서적 소속감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때로 잊고 산다. 세상이 정해준 ‘좋은 집’의 기준에 맞추느라 정작 내가 편안히 쉴 수 있는 ‘나만의 구석’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오늘 하루, 내가 머무는 공간의 작은 부분을 가만히 응시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화려한 장식이 없어도 나의 온기가 닿은 물건들, 나의 시선이 머무는 구석들이 나를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 느껴보는 것이다. 공간의 주권은 등기권리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나만의 서사를 지어가는 성실함에서 나온다. 내가 머무는 자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표류하는 세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잃지 않게 해주는 가장 단단한 닻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