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라는 이름의 비겁함에 대하여
SNS라는 광활한 광장에 글을 내어놓는 일은, 때로 내밀한 서재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과 같다.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공감에 마음이 데워지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한 불청객의 무례함에 평온하던 사유의 공간이 어지럽혀지기도 한다. 최근 내 글의 행간을 비집고 들어와 말꼬투리를 잡거나 비꼬는 댓글들을 마주하며, 나는 소통이라는 허울을 쓴 ‘배설’의 민낯을 보았다.
물론 글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쓰는 글이 어떤 진리도 아니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옮겨 놓은 것이어서 부족함이 충분하게 있기 마련이다. 비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것은 건강한 비판이 아닌, 오직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비겁한 시비였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들의 ‘뒷모습’이다. 날 선 언어를 싸질러 놓고는, 정중하게 건넨 나의 답변에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들에게 내 글은 대화의 소재가 아니라, 그저 일상의 스트레스를 투척할 수 있는 쓰레기통이었던 셈이다.
이런 ‘히트앤런(Hit and run)’ 식의 댓글은 소통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관계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뒤틀린 욕망의 표출이다. 그들은 상대의 반응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독설이 상대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사라진다. 대화할 용기는 없지만 상처 줄 권리는 누리고 싶은, 현대인이 앓고 있는 가장 초라한 심리적 증상이다.
더욱 참담했던 순간은 그 무례함의 주인공이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비꼬는 말투와 반말로 댓글을 써놓은 그 사람의 페이지에 가보았다. 그의 페이지에는 거룩한 사역의 기록들이 즐비했다. 강단 위에서는 사랑과 겸손을 설파했을 그가, 온라인에서는 타인의 사유를 짓밟는 포식자로 돌변하는 현실. 같은 성직자로서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대부분의 온라인에서는 익명성이라는 칸막이가 존재하지만 페이스북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모르나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가. 타인과의 소통에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이가 전하는 복음이 과연 누구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지, 나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목회는 곧 관계이며, 관계는 곧 언어의 품격에서 시작된다. 상대의 글을 곡해하고 말꼬투리를 잡는 수준의 인식으로 어떻게 한 영혼의 깊은 고뇌를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같은 목회자로서 내가 느낀 창피함은, 우리 시대의 ‘종교적 언어’가 삶의 태도와 얼마나 지독하게 분리되어 있는지를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을 달 권리가 그들에게 있듯, 반대로 그 오물을 치우는 권리는 나에게 있다. 무례한 댓글을 삭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소통의 거부가 아니라, 내 서재의 청결을 유지하려는 주권적 태도다. 비겁한 배설자들에게 내 귀한 사유의 시간을 내어줄 이유는 없다.
나는 오늘도 무례함이 휩쓸고 간 자리를 묵묵히 닦아낸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의 펜 끝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등불인가, 아니면 그저 날카로운 흉기인가. 타인의 서재에 발을 들일 때는 신발의 먼지를 먼저 터는 것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무례라는 이름의 비겁함 뒤로 숨는 이들이 더 이상 나의 평화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나는 더욱 열심을 담은 글쓰기로 내 영토를 지켜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