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함이 불러온 차가운 장벽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공간들은 점차 투명하고 단단한 장벽을 쌓고 있다. '노키즈존'이나 '노실버존' 같은 푯말들이 카페와 식당의 입구에 내걸리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인간미가 사라진 삭막한 세태라며 혀를 차지만, 사실 이 장벽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무례함이 타인의 평온을 무너뜨리고, 그 상처가 쌓여 만들어진 일종의 방어 기제에 가깝다.
자유의 한계와 책임의 실종
근대 자유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그 유명한 ‘해악의 원칙(Harm Principle)’을 제시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지만, 그 자유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지점에 이르면 제약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공공장소에서 아이의 소란함을 방관하는 부모나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의 무분별한 태도는, 사실상 이 '해악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안식을 침범할 때, 그 공간은 더 이상 공존의 장이 아닌 소리 없는 전쟁터가 된다. 특정 집단을 거부하는 문화는 단순히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며 타인의 자리를 존중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공동체의 반작용이다. 결국 소수의 몰지각한 행동이 성실하게 에티켓을 지키는 대다수의 시민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셈이다.
배제라는 고육지책 뒤에 숨은 서글픈 진실
배제는 언제나 가장 쉽고도 옹졸한 해결책이다. 공간 운영자들이 특정 집단 전체를 차단하는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일일이 무례한 사람을 가려내어 제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처방은 우리 사회의 소통 능력이 그만큼 퇴보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이기도 하다. 서로의 불편함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조율하기보다, 아예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
진정한 품격은 타인을 배제하는 폐쇄적 방식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견뎌내는 '참을성'과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단속하는 '염치'에서 나온다. 내가 지불한 비용이 타인의 평온까지 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례함이 권리로 둔갑하고, 방임이 자유로 포장되는 사회에서 배제의 장벽은 점점 더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거울 앞에 서야 할 우리의 뒷모습
우리는 배제의 부당함을 외치기 전에, 먼저 공공의 영역에서 내가 남긴 뒷모습을 살펴야 한다. 타인의 공간을 존중하지 않는 이에게 환영을 해줘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결국 노키즈존 같은 장벽을 허무는 열쇠는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되찾아야 할 최소한의 시민 의식에 있다.
나의 아이가, 혹은 나의 부모님이 누군가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불편한 존재'로 낙인찍히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오늘 거울 앞에서 스스로의 무례함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타인의 자리를 내어주는 넉넉함은 내가 먼저 타인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늘, 누군가의 평온을 지켜주는 든든한 이웃이었는가, 아니면 그 평온을 흔들어놓는 불청객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