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라는 이름의 가담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에서 가장 흔하게 들리는 말 중 하나는 “나는 중립이다”라는 선언이다. 언뜻 보기에 이 말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성적인 태도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현자의 풍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안의 본질이 선과 악, 혹은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명확할 때 내뱉는 중립 선언은, 실제로는 갈등에 휘말려 손해 보기 싫다는 비겁한 회피에 불과하다. 침묵은 때로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되며,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의 중립은 결국 강자의 횡포를 묵인하는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객관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생존 본능
현대 사회에서 중립은 ‘합리주의’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양쪽의 입장을 모두 들어봐야 한다는 기계적인 평등주의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명백한 부조리 앞에서도 이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비겁한 생존 전략이다. 우리는 분노해야 할 순간에 냉정을 핑계로 하고, 연대해야 할 순간에 객관성을 이유로 뒷걸음질 친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 자신의 안위와 평판을 지키려는 옹졸한 자기 보호 본능에서 기인한다. 어느 쪽의 미움도 사지 않겠다는 태도는 결국 어느 누구의 아픔에도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중립이라는 이름의 회색지대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이들이 모여드는 가장 안전하고도 황량한 도피처일 뿐이다.
단테의 지옥과 방관의 죄
인류의 고전인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은 중립을 지키는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판결을 내린다. 단테는 지옥의 입구에서 ‘방관자들’을 마주한다. 이들은 살아생전 선을 행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악을 행하지도 않은, 즉 철저히 중립을 지켰던 영혼들이다.
천국은 이들의 비겁함을 용납하지 않아 거부했고, 심지어 지옥조차 이들이 들어오면 지옥의 악인들이 자신들보다 못한 자들이라며 비웃을까 봐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지옥의 문턱에서 벌레들에게 쫓기며 영원히 방황하는 벌을 받는다. 단테가 이토록 매몰차게 이들을 묘사한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의 정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배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힘의 균형을 강자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적극적인 가담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운동가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Desmond Tutu) 역시 "부조리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면 당신은 압제자의 편을 선택한 것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명확한 부조리 앞에서 택해야 할 목소리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기계적인 중립이 아니라, 가치 판단의 용기다. 모든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으나,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거나 명백한 불의가 자행되는 지점에서는 명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주권적인 인간의 태도다.
진정한 지성이란 양비론 뒤에 숨어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편에 서서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당신은 오늘 갈등의 현장에서 지혜를 가장한 침묵을 택했는가, 아니면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말했는가.
중립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고통과 연결될 수 있으며 공동체의 온도를 1도라도 올리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비겁한 침묵의 금메달보다는, 정의로운 소수의 낙인 속에서도 당당히 고개를 드는 인간의 품격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유산이자 인간에 대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