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 뒤에 숨은 정치의 민낯
사법부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다. 입법과 행정이 정치의 거센 파도에 휩쓸릴 때, 시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은 법전의 문구와 판사의 양심뿐이다. 그러나 최근 내란과 국정농단이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우리 사법부가 보여준 모습은 보루라기보다 위태로운 모래성에 가깝다. 같은 사건, 같은 증거를 두고도 재판부마다 극과 극을 달리는 판결을 내놓는 현실은 법의 예측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국민의 신뢰를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다.
법전의 해석인가, 권력의 눈치보기인가
재판은 단순히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을 넘어, 공동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정의를 선포하는 엄숙한 행위다. 하지만 최근의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는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누군가에게는 헌법 질서를 파괴한 중죄로 다스려지던 행위가, 다른 재판부에서는 통치 행위라는 모호한 수식어 뒤로 숨어 면죄부를 받는다. 같은 사건인데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처벌이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러한 극명한 온도 차이는 사법 정의가 법의 정합성이 아닌, 판사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권력의 기류에 따라 춤추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게 만든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를 받아먹었거나 약점이 잡힌 것이 아닐까? 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순간, 사법부는 스스로의 존엄을 깎아내리고 무도한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뿐이다.
베일 뒤에 서지 못한 판사들
현대 정치철학의 거장 존 롤스(John Rawls)는 그의 저서 <정의론>에서 정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제시했다. 그는 법 집행자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뒤에 서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내린 판결이 내 앞날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려지는 결정만이 진정으로 공정할 수 있다는 논리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법부의 위기는 판사들이 이 '무지의 베일'을 스스로 걷어버린 데서 기인한다. 판결문 뒤에 숨은 판사의 얼굴이 보이고, 그가 바라보는 권력의 방향이 읽힐 때 법은 공정한 잣대가 아닌 형편없는 무기로 전락한다. 같은 사안에 대해 판사마다 잣대가 고무줄처럼 변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이라는 사법의 대원칙을 뿌리째 뒤흔드는 일이다. 롤스가 우려했던 대로, 특정한 이해관계에 매몰된 법 집행은 사회적 합의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비극을 초래한다.
실종된 정의를 되찾기 위한 태도
사법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평범한 시민들이다. 법이 권력자의 방패가 되고 약자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될 때, 우리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사법부의 불신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냉정한 눈으로 그들을 감시해야 한다. 판사의 양심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국민의 상식이라는 대지 위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법부의 오만한 독립성이 '정의의 독점'으로 흐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판결이 과연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는가. 망가진 저울을 다시 세우는 힘은 권력의 역할만이 아니라, 부당한 판결에 분노하고 올바른 정의를 요구하는 주권자들의 단단한 연대에서 나온다. 당신은 오늘 사법부의 선언에서 정의를 보았는가, 아니면 옹졸한 타협을 보았는가. 사법부가 다시 국민의 신뢰라는 든든한 보루가 될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야 한다. 또한 사법부는 자신들이 특별하게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선민의식을 내려놓고 동등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