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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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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니 Dec 27. 2022

모독 4

미선


 야호, 이런 일이!

 종철 선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도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오빠의 사정은 이러했다. 춤 연습 도우미가 잠적해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나름 매니저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그러던 차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나를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있으면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맛있는 것도 꼭 사주겠다고 덧붙이면서.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다. 속으로 쾌재를 외치면서 조용히 말했다. "네, 할게요."

 힙합 보이 종철 오빠와 춤 연습 기회라니. 종철 오빠의 기쁜 표정을 보니 나도 행복하다.

 종철 오빠는 버려진 빈 건물을 알려줬다. 비밀 연습실이라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며 강조했다.

 나는 꼭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종철 오빠와의 비밀이 생겼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날아갈 것 같다.

 예쁘게 꾸미고 가야겠다. 




경창


 봉고차가 도착한 곳은 변두리에 흔한 가든이다.

 야외의 평상에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안경잡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전후로 나와 비슷해 보인다.

 운전기사와 나를 데리고 온 길잡이도 합세했다. 그 셋은 나이가 비슷해 보여 지위고하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정황상 마주 앉아있는 안경잡이가 우두머리일 것 같다.

 이들은 하나같이 매너가 좋았다. 단정함 그 자체였다. 허약해 보인다는 공통점도 있다.

 마주 앉은 안경잡이가 금방 떠온 막걸리라며 주전자를 들어 한잔 권했다. 나는 아주 좋은 생각이시라고 화답하며 잔을 들었다.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물씬 풍긴다.

 술이 몇 잔 돌고 안경 쓴 남자가 말했다. 

 자신들은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조폭 같은 거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라 일종의 설거지 전문업체라고 했다.

 무슨 설거지를 업체에 맡기냐니까.

 과거에 복지원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면서 말을 시작했다.

 부려먹기 좋게 두들겨 패거나 이름 모를 약을 먹여 바보로 만들었는데, 자신들처럼 상황 판단이 빠른 아이들은 바보 연기를 하며 무사히 모면했다고 회고했다.

 천신만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고아였거나, 너무 어린 나이에 유괴되어 보호자의 소재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가족이 있어도 찾지 못하는 고통은 어떠할까.

 그들은 특유의 자생력으로 각계각층으로 뿌리내렸고, 어떤 이는 성공도 하고 일부는 다시 나락으로 빠진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들이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교류했다고 했다.

 시궁창 같은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해봤지만,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음지에서 법의 저촉을 피해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을 마련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설거지로 비유했다.

 주전자를 들면서 말했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꺼?"

 나는 잔을 내밀며 그런 일을 처리해 주는 대가로 얼마를 받냐고 물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일축했다. 

 나는 돌아가는 차에서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곳은 집 근처 공원 벤치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일상생활이 이어졌다.

 "비폭력주의자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갸들이 인간인교? 인간의 도의를 저버린 놈들은 더이상 인간이라 부르지 않습니더."

 그날의 일을 반추했다. 그들은 나에게 정보를 요구했다. 딱히 정보라고 할 수도 없는 사소한 것이었는데 그게 바로 '시간표'였다.

 나는 그 덕에 죄의식 없이 가볍게 풀어 놓을 수 있었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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