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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기념품샵에서 일해보셨나요?

인생 첫 풀타임 아르바이트 직장이 기념품 가게인 덕에 사회의 쓴맛을 거의 느끼지 않고 순항 중인 매일. 행복한 얼굴의 관광객들과 일등석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항구의 전경, 여름이면 모여드는 아이스크림 트럭과 길거리 연주자들까지... 하지만 질투는 금물. 눈만큼은 즐거운 하루하루에 권태를 느낄라치면 정신이 벌쩍 들도록 하는 에피소드도 여러 개 있으니.


이 코딱지만 한 가게에서 꼭 그러셔야겠나요

처음 인수인계를 받은 날, 사장님은 혹시나 도둑이 들면 그 자리에서 잡지 말고 인상착의를 적어 놓으라고 하셨다. 직원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그분의 성품도 성품이거니와 바코드, 도난경보기 하나 없는 작은 가게에서 수상한 거동을 보이지 않는 손님들의 도덕성도 가끔 내가 놀라는 부분 중 하나이다. 물론 고객의 도덕이 아니라 구석까지 닿지 않는 우리의 시야 탓일 수도 있겠지만. 서당개 삼 년, 아니 가게 직원 삼 개월이면 도둑을 잡는다고 했던가. 수상한 사람은 티가 난다.

실컷 E와 떠들던 날, 갑자기 그녀가 CCTV 화면을 한 사람에게로 고정시켰다. 종종 엉뚱한 E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데 그런 말을 한다. "저 사람 30분째 저 쪽에만 있네. 난 도둑을 잘 알지." 불쌍하리만치 눈치를 보던 그 사람은 선글라스를 후드티 쌓아놓은 곳으로 일부러 옮기더니 부리나케 가게를 나갔다. 동시에 바짝 붙은 E, 저기요 뭐 가져가신 거 아닌가요 하며 불러 세우지만 피식 웃으며 떠난 그 여자. 그날의 교훈, 아무리 수상한 사람이 티가 나도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사회에선 심증만으로 사람을 몰아세우지 못한다. 맞다. 못 잡았다는 소리다.

차라리 그만 왔으면 하는 좀도둑도 있다. 누가 봐도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인데, 올 때마다 동물이 새겨진 작고 넓적한 돌을 이마에 대가며 하나하나 고르다가 이내 지갑을 잊었다든가 저기 있는 자기 여자 친구에게 돈을 빌려오겠다든가 하며 떠난다. 지난번에 만지작거리던 드림캐처를 매달고 오거나 해서 그 사람이 좀도둑이란 의심은 모두가 하지만 7달러짜리 돌 몇 개 가지고 소란 일으키는 건 선임 G도 원하지 않고, 그저 악취를 풍기면서 카운터에 있는 다른 손님을 쫓아내지만 않았으면 하는 심정.


술이 웬수

때때로 다이내믹 코리안을 즐겁게 하는 이야기보따리도 존재한다. 5월 무렵 야간 담당이던 E가 날 위해 준비해준 소식. 아직 관광철이 아니라 그런지 공용화장실이 일찍 닫자 술에 취한 남자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가게 앞 범고래 동상에 소변을 봤다고. G가 안절부절못하며 경보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까지 했던 사건이란다. 취객의 난동이라니, 심심하진 않았겠다는 순전히 제삼자의 입장에서 내뱉은 대답에 E는 낄낄 웃었다. 화룡점정은 그날 동상을 부여잡고 사진을 찍었던 아이들. 내가 경악한 사이에 비꼬기 달인 E는 한 마디를 날렸다. "저런, 저기엔 그 사람이 안 쌌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잔잔한 틈이 없던 다음 날, 역시나 잔뜩 술에 취한 다른 남자, 해변가도 아니고 항구인 이곳에서 다이아 반지를 찾겠다며 무턱대로 뛰어들었다.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다른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며 꾸역꾸역 다이빙했다고. 다이아 반지의 진짜 행방은 둘째 치고, 이 모든 해프닝을 1열에서 관전하는 것도 단점이자 장점이랄까.


그놈의 마약

대마초가 합법이기로 유명한 캐나다. 우리 가게에서도 대마잎을 소재로 한 상품을 파는데, 그 잎의 정체를 몰랐던 나를 동료가 비웃은 적도 있었다. 아무튼간에 정책의 영향인지 혹은 북미 및 남미와의 접근성 때문인지 종종 약에 취한 사람들이 들어온다. 이들의 특징은 초점이 안 맞는 눈과 어눌한 말투. 처음이야 놀랐어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방심은 위험하다.

가게에선 젊은 피인 덕에 물류 정리 시 일 순위 선발되는 나날, 인력난인지 사장님 D와 함께 일을 하는데 웬 남자가 들어왔다. 건물 소속 직원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라 소스라치게 놀란 나와 D에게 꼬부라진 발음으로 그가 건넨 질문, "너희 가장 좋은 곳이 어딘지 알아?". 진짜 장소를 묻는 건지 천국에 대한 언어유희인지, 하여간에 얼어붙은 나를 남겨두고 사장님은 문을 닫고 나가 그 사람을 처리하고 들어오셨다. 직원 걱정과 용감함이라면 혀를 내두르는 분. 나중에야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감각에 몸서리를 치며 신입 M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니 그녀가 그런다. "난 잘 알지. Jail." 두려움도 가시게 하는 프렌치 캐내디언의 농담이란.


스치면 인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진상은 있다. 냉장고 캔음료와 과자 봉지가 개봉되어 있다거나, 언급도 없이 물건을 부수고 떠난다거나, 혹은 물놀이할 장소가 절대 아닌 요 앞바다에 발을 담그고 젖은 채로 들어온다거나, 문 열기 바로 전 가게 앞에 대변을 싸지르고 떠난다거나(...) 그럼에도 사람, 즉 직원들에게 진상을 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하루를 마치고 기억에 남는 건 이런 고객들보다도 진기한 인연들이 대부분.

우리가 속칭 '실버맨'이라 부르는 남자도 그 부류에 속한다. 돈 통을 놓고 길거리 공연을 하는 버스커들과 다르게 4월부터 줄곧 나타난 이 남자는 그 이름답게 온 몸을 깡통로봇처럼 빛나는 은빛으로 감싸고 새부리 모양 헬멧을 눌러쓴 채 전동보드에 우뚝 서서 항구를 종횡무진한다. 처음에는 할 짓도 없다 싶은 그에 대한 냉담이 무료 길거리 퍼포먼서의 근성에 대한 찬사로 바뀌며 이제는 안 보이면 조금 섭섭할 지경이 됐다. 아직도 근본적인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행복과 자부심에 넘친 사람을 말릴 이유 또한 없지 않은가.

가게 바로 근처에서 워터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매일같이 보는 단골이다. 우리가 간식을 20% 할인해주는 대신 공짜로 라이드를 제공하는 이 분들. 벼르고 벼르다 어느 정오, 지인의 따님과 함께 끝내주는 승차를 경험한 후 다시 만난 기사님. "그때 두 명이서 왔었지?" 이름도 얼굴도 악센트도 모두 다르지만, 가끔 마주치는 소소한 인연은 즐겁다.

기이한 행각을 벌이거나 자주 보지 않아도 절로 기억에 남는 손님도 있다. 특히 행복한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피로에 찌든 얼굴로 가게에 들어섰을 때 만난 남미 복서들도 그중 하나인데, 인스타그램 계정과 격투 영상까지 보여주면서 커리어를 자랑하고 나갔다. 온몸으로 관광객이라 자랑하는 표정을 짓고 머리에 얹은 화관, 어느새 갈아입은 빅토리아 맨투맨까지. 아마 나와 동년배일 듯한 이 소녀들의 앞날을 그때도 지금도 응원한다.


그렇다고 일이 고되지 않다 하면 그것 역시 거짓말이다. 작은 외관과 달리 꽉찬 진열대를 증명이라도 하듯 물건으로 가득찬 창고들. 그곳에서 물류 정리를 하는 날이면 한국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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