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고
떠나기 전 의기양양했던 내 모습이 떠오르면 이불을 발로 걷어찰 만큼 부끄러워진다. 파트타임, 소설 쓸 여유가 있을 만큼, 3개월만-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얼마든지 일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을'이다. 아무리 직업의 세계가 해변처럼 넓고 모래알만큼 많다 해도 누가 늪 서식생물을 들여보내 주냔 말이다. 이쯤 되자 태도는 돌변했다. 은행업무, 사무직, 이름 있는 호텔의 빈자리에만 이력서를 넣던 나는 곧 캐내디언 식당이라면, 프랜차이즈라면, 이름이라도 들어본 적 있다면 전부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자구책으로 한인식당 서버를 알아보고 있을 때-오해는 금물. 굳이 캐나다까지 왔는데 영어를 쓰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 때문이었으니-같이 밥을 먹던 누군가가 만류했다. 그래도 외국에 왔는데 외국 사람과 어울려야 하지 않겠냐고. 아무래도 영주권자의 진심 어린 호소였으니 나는 그분의 추천에 따라 그날 밤 스타벅스에 지원서를 넣었다. 구직사이트를 벗어나 회사 사이트로 눈을 돌리며 시도의 저변은 그렇게 넓어졌다.
遲遲不進
사실은, 이미 한 회차 분량의 구직 후기를 완성한 상태였다. 문제가 있다면 감동도 재미도 없는 데다가 결국 어떤 곳에서도 최종 합격을 받지 못해 구질구질한 수기로 끝났다는 것. Prescreening Test(사전심사)란 명목으로 골치 아픈 질문을 보내온 스타벅스에 자소서 한 바닥짜리 문서를 보내고, 무려 그룹 화상 인터뷰를 통과해 으리으리한 레스토랑까지 가서 두 변째 면접을 마치고, 마침내는 집 근처 쇼핑몰의 속옷 소매점까지 찾아갔을 땐 거나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 이름도 번쩍거리는 Wolford. 여성 럭셔리 의류 매장이라길래 부랴부랴 답장을 보내고 면접 준비를 했던 전 날, 사전조사를 위해 브랜드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뜬 건 란제리 사진이었다. 편협한 시각을 전시해서 죄송하다. 머리로는 나도 알았다. 직업에 귀천은 없을뿐더러 애초에 점원으로서의 근무에 무슨 이상한 잣대를 들이댄단 말인가. 다만 물리적 거리와 기가 막힌 시선이 섞이면 골치가 아파지는 화학작용이 탄생하고 마는데...
무슨 소리냐고? 가뜩이나 워킹 홀리데이에 대한 선입견이 이상하리만치 있는데 과연 내가 부모님에게 스타킹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자식의 삶이란 무시무시한 상상으로 채워지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거짓말로 얼버무려도 마음은 반드시 불편해질 테고. 그러니 이런저런 걱정으로 이미 의지를 잃은 상태에서 떨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뷰를 썩 괜찮게 본 데다가 매장의 위치와 이미지가 꽤 깔끔했지만 내 바보 같은 마음가짐을 생각하면 떨어져야 마땅했다고 본다.
비 온 뒤 정말 땅은 굳을까
이상하게 불합격 통지만 자꾸 받는 바람에 전의를 상실,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지원서 돌리기는 일상이고 면접은 하도 많이 봐서 영어도 그냥저냥 나오니 말이다. 굳이 걱정이 있다면,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이 현실 적응도가 높아지는 여파인지 아니면 우울 속으로 침전하는 중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 정도.
그날은 비가 왔다. 무려 파트타임 매니저를 모집한단 말에 감지덕지하며 답신을 보냈던 전날과 달리, 막상 떠날 시간이 되니 눈앞이 막막했다. 가장 빨리 가는 루트는 한 시간 반, 이십 분 내내 정류장까지 걸으며 코트고 신발이고 다 젖었다. 그런데 어라, 버스가 안 온다. 급기야 지각 메시지를 보내다 처음으로 '그만둬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찾아왔다. 아주 찰나였지만 감정의 강렬함은 기억한다. 미련함만 남은 채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공사장 물웅덩이로 내달리는 차의 물세례를 맞으며 도착한 면접장소. 다른 지원자가 있어 빗속에서 십오 분을 서있었다.
면접은 최고였다. 내가 거지꼴에다 아주 멀리서 왔다는 사실만 빼면. 결과부터 말하자면 비극이었고, 사실 과정이 진절머리 날 만큼 끔찍했다. 오랜 길을 돌아온 그 밤엔 요리를 하다 머리부터 소스를 뒤집어썼고, 씻고 방에 들어갔더니 드라이기는 고장 났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던 사람, 기상청과 적당히 협조해주길 바란다. 다음 날엔 온갖 컨디션 난조 속에 예고 없는 비를 맞았으니까. 빗방울 속에서 사과를 먹으며 나는 로또를 샀다. 양말이 전부 해져서 바느질 도구를 사러 편의점에 들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미국 친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WHY? 왜 그렇게 사는 거야?" 음, 바닥까지 떨어져야 일어날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날 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넣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지원서를 넣었다.
기적이 없는 게 인생이라면
이쯤 되면 영화에선 기적처럼 기회가 날아오던데 아쉽게도 나는 트루먼쇼 주인공이 아닌가 보다. 샐러드 가게 매니저 면접 이후, 인력시장처럼 파티 스태프를 구하는 회사와 면접을 약속한 날엔 첫눈이 내렸다. 역시 아름답다기보단 진눈깨비의 폭우화 수준이었다만. 면접 갈 길도 바쁜 내게 아침부터 닥친 건 레진이 떨어져 나간 이빨. 세수를 하는데 작은 도자기 조각 같은 게 입에서 떨어졌다. 환장이란 그때를 이르는 말이겠지. 몇십만 원짜리 여행자 보험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단다. 이게 도대체 얼마야, 그야말로 멘탈 붕괴의 현장 속에서 나는 침대에 누웠다. 나약한 모습을 기록하고 싶진 않지만 같은 상황에 처해보면 알 것이다. 여태까지 그나마 잘 버텨왔다는 걸.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 마침내 못 가겠다고 메일을 보내려던 순간, 실업급여가 들어왔다는 은행의 알림을 받았다. 기적은 없어도 제도가, 정부가, 꼬박꼬박 세금을 내며 일을 하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날 돕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십칠 분 동안 눈보라를 헤치며 걸어갔다.
기록의 이유
좋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지금까지 구직기를 올리지 못했던 건 '마침내 일을 잡아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면접을 보러 다닌다. 심지어 어제 만난 인사담당자는 지루하고 길고 꼼꼼한 면접 끝에 사실은 12월 중순에 개업한다며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하기사 나도 얼마 남지 않은 취업비자를 불문에 부치고 다녔으니 할 말 없지. 결국 오늘 한 직장에서 OT 초대를 받았는데, 취업비자 사본을 지참하라길래 미리 씁쓸함을 음미하고 있다.
희망찬 교훈도 주지 못하고, 독자가 글을 읽어 내려간 책임도 지지 못한다면 대체 수기를 남기는 효용은 어디에 있을까. 적나라하고 긴 문단을 몇 개 삭제하며 말을 고르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 말대로 소위 '불운한'순간을 살고 있어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건 어떤 사건사고가 터져도 전부 글을 쓸 소재로 치환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일상툰 작가나 유투버가 소재를 찾아다니듯 말이다. 실패와 피로감이 재료라면, 완성작의 쓸모는 아마 먼 훗날을 위해서일 것이다. 언젠가 지금만큼은 덜 힘들고 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다시 와서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지난날의 일기를 본다고 기적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슬픔은 희석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