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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May 05. 2023

이만하면 충분해

당신은 나의 친구의 친구

자율성. 해외에 산다는 건 이게 있다는 뜻이다. 이는 초대받은 손님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친구의 집에 놀러 간다면 친구는 그녀의 일을,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어쨌든 면접과 다른 약속, 수업 등으로 친구는 가끔 집을 비웠다. 자연스레 친구의 룸메 N과 밥을 먹고 떠들거나 주변을 둘러보고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것이 내 일주일 간 일상이 되었다. 근처 한인마트에서 떡만둣국을 사 와 N과 나눠 먹고 보답으로 인도식 디저트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란.


겉모습에 속지 말자. 예쁜 모습에 떡인 줄 알았더니 버터크림을 뭉친 맛이었다. N, 미안해. 맛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그 밤, 룸메인 N과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삼십 분 이상을 토론하다 잠들기까진 이게 얼마나 짧은 대화인 줄 몰랐다. 다다음 날 밤, 친구가 평소 다니던 양궁 모임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나를 데려갔을 때, 나는 고작 두 시간짜리 대화에 영혼까지 털리고 돌아왔다.

특이한 집이었다. 내부는 예쁜데 신기하게 문이 많이 달린 집이라고 해야 할까. 알고 보니 집째로 빌렸단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즐긴단 말에 빠르게 수긍했다. 이탈리아와 뉴욕과 산 호세를 종횡무진하는 삶이란.

처음 삼십 분은 어쩌다 아시안계만 모인 테이블에서 자기소개와 토론토 교통시스템의 험담, 기타 워홀 이야기를 하며 때웠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 ‘진짜배기’ 모임인 소파에 앉게 되었는데,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피곤도 하거니와 대화의 화제 속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심지어는 늦게 도착한 무리 중 하나가 교수님 같은 말투인 바람에 깜빡 졸 뻔했다. 집을 나선 친구의 물음. “엄청 잘하다가 왜 조용해졌어?” “짧은 파티라며!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네.” “세상에, 두 시간은 짧은 거야.” 알고 보니 파티는 반나절에서 하루종일이란다. 덕분에 맨 정신으로 미드를 볼 수가 없어졌다. 이런.



Enough is enough

기차 셧다운으로 인해 감옥섬 투어를 가지 못했던 일요일을 기억하시는가? 화요일에 가자며 굳은 약속을 했지만, 갑자기 면접이 잡히는 바람에 친구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며 늦잠을 잤지만. 글쎄 일어나 보니 화장실도 나올 때 마음이 바뀐다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찾고 싶어졌다.


대학시절 한 번 극장가를 휩쓸었던 로맨스 영화의 정수 <어바웃 타임>. 자세한 스포일러는 못하지만 주인공은 같은 날을 두 번 겪으며 일상에서 놓친 소중함을 음미한다. 나야 글쓰기를 위해 일 년을 버릴 만큼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니까) 호기롭게 기차를 탔다지만. 음, 혼자는 역시 외로웠다.


워홀을 하며 가장 자부심을 만끽하는 순간은 내 독립성을 인정받을 때이다. 오로지 내 밥벌이가 가능하고, 용기를 내어 사람을 사귀며, 눈코 뜰 새 없이 들이닥치는 해프닝을 처리하는 것. 그런데 고립은 만만치가 않다. 혼자가 좋아서 왔는데 물리적으로 혼자가 되니 식욕도 떨어진다. 더 무서운 건, 어쩌다 둘 이상이 살게 되면 무심코 혼자 남겨졌을 때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크기로 외로움이 찾아오는 현실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잔물결을 쳐다보는 나 또한 그랬다. 여전히 물개가 햇볕을 만끽하고, 감옥섬 투어는 아니어도 작은 보트도 탔는데. 심지어 눈치 볼 필요 없이 길거리 핫도그를 입안에 욱여넣었는데도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할렘가를 피해 무작정 도시의 골목 위를 걷고, 정신을 차려보니 사십 분 거리의 차이나 타운에 도착해 있었다.


문제의 우육면


무심코 들어간 가게가 따뜻한 집밥의 맛이라든가 하는 일은 영화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느글거리는 우육면을 씹다가 절반도 먹지 못했고, 직원은 영어가 통하지 않았으며, 먹지도 못한 음식에 팁을 많이 줄 수 없다는 내 의사를 거부하고 식당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았다.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캘리포니아에선 팁 요구가 불법이라던데, 내 화를 돋운 건 직원의 태도였다. 나를 관광객 취급하며 당신은 팁을 더 내야 한다고 일일이 가르치는 것이다. 최소한의 퍼센트를 채워야 한다나.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결과는 나의 K.O. 패. 가방 끈이 잡힌 채 어디 한 번 같은 상황에 처해 보시길. 어둠이 내려앉아 적막해진 도시, 우버를 잡으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샌프란시스코는 이 정도면 되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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