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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Mar 14. 2024

뜻밖의 몰카, 몰카의 쓸모

사랑받는 K남편으로 살기는 어려워

쉬는 날이 더 바쁜 남편.

평소엔 늘 내가 아이들 픽업을 도맡아 했으니 비번일 때는 자신이 픽업을 하겠다 해서 그래준다면 사양하지 않고 고마운 마음만 받을 게 아니라 맘껏 누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차라리 출근하는 게 홀가분할 것 같은 남편의 빡빡한 하루 일정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라던 리쌍의 노래처럼 휴무가 휴무가 아닌 남편의 휴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번인 남편의 오늘 하루 일정을 약간 설명해 보자면 08시 30분에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기, 10시에 왕복 1시간 30분 거리의 어머님댁 방문하여 직접 담그신 고추장 및 반찬 받아오기, 13시 30분에 감기 기운 살짝 도는 막둥이 픽업하여 이비인후과 들렀다가 센터에 데려다 주기, 15시 30분에 코 찡찡 증상 다 나았는지 딸내미 픽업하여 역시 이비인후과 진료 후 센터에 데려다 주기, 16시에 마누라랑 코스트코에 가서 장보기, 집에 와서 장 봐온 식자재 정리하기, 18시 30분에 센터에 가서 아이들 픽업해 오기까지가 오늘의 스케줄이다.

만일 나였다면 '이런 스케줄이라면 휴무 반납이오!' 외칠 것 같은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빡빡하고 촘촘함에 몸서리를 쳤을 것 같다. 하루에 여섯 탕을 뛰어야 한다니 숨이 막혀온다. 대한민국의 사랑받는 K남편으로 살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 일정이 두 개만 있어도 괜히 정신없는 나는 남편의 일정을 다시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그려보자니 왠지 비서가 필요할 것 같은 기분이다.


비서 따위 필요 없다는 듯(하긴 비서가 있다면 그 모든 일은 비서에게 시켰겠지) 남편은 실행에 옮기고 말겠다는 각오와 비장한 다짐의 표정을 지은 채 카트를 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여보~~~!"


으이그. 이냥반 뭘 또 빠뜨렸대?


"왜, 뭐? 핸드폰? 차키? 어떤 거, 뭐!"


그랬더니


"얼른 나와서 남편한테 마중인사를 해야지~"

라며 씨익 웃는다.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남편에겐 2024년 올해 들어 가장 웃기는 대사였다고 말해 주었다. 정말 무방비 상태에서 한 방 맞았다. 평소 내가 남편에게 뭘 잘해주지는 못해도 출근할 때는 반드시 현관까지 나와서 자식이 부모님에게 인사하듯 꼭 인사하고 손을 흔들어 주던 나였다. (물론 내가 잠에서 깨어있을 때만 해당되지만) 90도로 고개 숙인 인사는 너무 아랫사람 느낌이 강해 자존심 상하니까, 두 손을 배꼽 위로 가지런히 포개 올린 상태에서 고개는 1도 숙이지 않지만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폄으로써 상당히 존중하는 척하며 마치 유치원생처럼 인사를 했더랬다. 한데 아이들 픽업하는 일을 비번인 남편이 하겠다고 했으니 어젯밤엔 남편을 믿거라 하고 새벽까지 깨어 있다 잠깐 자고 일어난 바람에 잠이 덜 깨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눈만 겨우 뜨고 아이들 아침을 차려주고는 비몽사몽 몽롱함에 인사를 깜빡 잊고 건너뛴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늘 받았던 인사이니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가 너무 받고 싶었나 보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가족인데도 퇴근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포옹을 해 버릇했더니 처음엔 뜨악했던 상대가 어느새 익숙해져 어느 순간 포옹을 안 하면 이제는 왜 안 하느냐고 되묻던 영상이 떠올랐다. 딱 그 상황과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늘 인사하던 아내의 인사가 없으니 어색했는지, 아니면 장난을 치고 싶었는지 조선시대 왕처럼 나를 불러서는 인사를 받고야 말겠단다. 내가 하도 어이없어 눈을 흘기며 웃으니 남편도 같이 씨익 웃는다. 그런데 한 술 더 떠 고개를 살짝 틀더니 자기 볼을 가리키며 "여기에 뽀뽀해야지~" 한다. 이냥반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와... 이 어색함 어쩔... 나는 못 들은 척 "잘 갔다 와~" 하고 두 손바닥을 얼굴 높이까지 올리고 자동차 앞유리 와이퍼처럼 신나게 뽀득뽀득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남편은 하루 종일 자동차와 한 몸인 듯 맡은 일을 게임 미션 처리하듯 하나씩 하나씩 클리어해 나갔고, 16시경 남편과 함께 코스트코를 가는 시간.



https://brunch.co.kr/@287de5988170492/718


홍게 맛이 나는 계란말이 때문에 계란이라면 이제 질릴 만도 한데 계란말이는 계란말이요, 계란은 계란인 것처럼 냉장고에 딱 한 알 남아 있는 계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안해졌다. 모름지기 계란이란 늘 한 판 정도는 냉장고에 쟁여놔야 마음이 편안한 법. (그래봤자 4인 가족이 하루에 한 알씩만 먹어도 일주일이면 다 먹어치운다) 그렇게 계란을 한 판 아니 두 판을 사고, 고기에, 라면에, 바나나, 김, 부침가루, 슬라이스 치즈, 만두, 빵, 커피, 로션, 목욕용품, 여성용품, 등 등 '어머, 저것도 사야 해.', '맞다, 집에 이거 다 떨어졌지?' 하며 주섬주섬 주워 담다 보니 또 또 대형 카트는 봉긋하게 산을 이루고 말았다. 분명 다른 건 다음에 사고 오늘은 계란이랑 고기만 좀 사 오자 했었는데 역시나 오늘도 실패. 이래서 코스트코는 자주 오면 안 된다니까.


집에 도착하여 차 트렁크에 넣고 갔던 카트를 꺼내고 물건을 옮겼다. 식빵이나, 계란을 아래에 두고 무거운 물건을 위에 올릴 경우, 네모난 식빵은 찌그러진 세모로 변하고 계란은 깨질 수 있으니 카트에 물건을 담을 때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무거운 것을 제일 먼저 차곡차곡 담은 후에 맨 위는 조심해야 하는 물건을 조심스럽게 올리는 게 정석이거늘, 남편은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 이 중요한 단계에 가끔 무심하게 물건을 급히 채우다 낭패를 본다. 물건의 외형이 찌그러지고 찢어지고 상처가 나는 경우가 더러 있어 내가 그동안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었다. 하지만 아내 말은 남편의 오른쪽 귀로 들어갔다가 왼쪽 귀로 흘러나가는 게 국룰인지 오늘도 역시나 계란을 맨 밑바닥에 넣는다.


"헐, 자기 제정신이야? 깨지면 어쩌려고?"


하지만 남편은 괜한 자존심에 도로 꺼내는 법은 없지. "이 정도는 괜찮아." 하며 그냥 그 위에 물건을 쌓는다. 에효. 내가 얼른 살짝살짝 물건을 매만져 계란을 꺼내지 않고도 깨지지 않게끔 물건을 요리조리 담아 카트를 채우고 끌었다. 대용량 상품만 취급하는 대형마트답게 카트 하나에 다 들어가지 않아 집에다 한 번 부리고 다시 카트를 들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남편은 차에 대기하고 난 홀로 집에 들어와 카트에 실은 짐을 모두 꺼내며 혹시 깨진 계란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다가 모두 멀쩡히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다행이네 속엣말을 했다.


앗, 그런데 갑자기 오늘 아침에 나에게 인사를 여쭈라고 장난한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케이,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깜짝 몰카를 한 번 해야겠구만. 소소한 작전을 세우고 거기에 맞는 대사를 만들어 내다 보니 짜증이 멈추고 웃음이 살짝 비집고 나왔다.


카트를 끌고 나오며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던 남편의 뒤통수를 보자마자 나는 얼굴의 웃음기를 싹 감추고 짐짓 심각, 짜증, 한심의 표정을 담아 대사를 했다.


"으이그, 내가 맨 밑에 계란 두면 위험하다고 했지?!"

"어? 왜?! 깨졌어?"

"그래, 깨졌잖아. 실컷 장 다 보고 집 앞에까지 다~ 와서 깨 먹고 자알~ 한다."

"헉. 진짜? 몇 개나 깨졌는데?"

"...... (음... 몇 개 깨졌는지는 시나리오에 안 담아 뒀는데, 몇 개라고 하지? 한 개는 너무 약하고 와장창 깨졌다 해야 충격요법이 먹힐 텐데. 그렇다고 30개 한 판 몽땅 다 깨졌다 하면 너무 거짓말 같고, 절반? 아니 한 10개? 아니, 10개는 너무 딱 떨어지는 숫자인데, 한 7개? 7개는 너무 행운의 숫자인데...)"

이런 오만 잡생각을 하다 보니 대답이 늦어지고 말았고.

남편은 수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다시 내게 질문했다.

"어... 대답이 없다?"

"6개나 깨졌어."

(혹시나 안 믿을까 싶어 얼른 그리고 묵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본인 스스로가 본인에게 실망스럽다는 말투까지 얹어

"... 진짜...?"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나는 잽싸게 대답했다.


"뻥이야."



남편은 감쪽같은 나의 연기에 어처구니없지만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옆구리자신의 가장 긴 가운데 손가락으로 찔렀고, 나는 남편의 웃음이 잔뜩 묻은 한쪽 어깨를 퍽 때려주었다.


아...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 적당한 뻥은 삶에 활력을 주지.

아마 남편은 다음번 카트에 물건을 실을 땐 상하지 않을 만한 걸 꼭 먼저 맨 밑에 넣어줄 것만 같다.


서로에게 뜻밖의 몰카로 장난질을 쳤더니 밋밋한 일상에 몰카의 대부 이경규 님이 잠깐 왔다 가신 것처럼 활력이 솟는다. 살맛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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