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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Apr 29. 2024

엄마, 내가 돈을 벌어왔어

네 앞가림하기도 바쁠 텐데

이제 5학년 짜리, 덩치가 작으니 액면가 3학년 짜리 아들이 고기 냄새가 솔솔 나는 비닐봉지를 한껏 치들고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엄마! 내가 3만 6천 원짜리 고기를 가지고 왔어!"

ㅎㅎ 귀엽고 대견한지고.


4월 초 '달구운바람'이라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었다. 고깃집에서 돼지갈비 한 번 먹을라치면 온몸에 고기 냄새가 배는 것은 물론이고 고기 굽느라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바쁘던 기억 때문에 고깃집이 좀처럼 내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고기 냄새가 싫어 뷔페를 가면 다양한 종류의 메뉴를 접하는 행복감도 좋지만 나날이 게을러지니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코스대로 하나씩 음식을 가져다주는 한정식 집이 더 당기기도 했었는데.


여차저차 이런 연유로 고깃집이 안 내켰는데 남편이 여길 한 번 가보자며 고기를 손님이 직접 구워 먹는 게 아니라 주방에서 다 구워서 내준다는 말로 나를 유혹했다. 굽기는 좀 귀찮더라도 갓 구운 고기를 따끈할 때 바로 입에 넣는 맛으로 먹는 거지 다 구워져 나와 식어버리면 그게 무슨 맛이냐 싶었지만 속는 셈 치고 찾아간 식당은 예상을 뒤엎고 흡족하기까지 했다. 각 식탁마다 자이글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주방에서 구워 나온 고기는 자이글의 빨간 해를 닮은 뜨끈한 조명을 쐬며 따스한 온기가 빠질 새 없이 끝까지 맛나게 먹을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일반 고깃집에서 고기 집게를 잡은 사람은 먹으러 온 건지 뒤집으러 온 건지 헷갈리는 식사 자리가 아니라 모두가 편하고 느긋하게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어 몸도 마음도 한결 편안했달까.


몇 조각 집어 먹고는 화장실을 다녀온 막둥이가 그림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막둥이는 식당 벽 한쪽을 차지한 포스터를 가리켰는데 이 고깃집에서 주최한 어린이날 기념 그림대회였고 상품은 구운 돼지갈비 4인분이었다. 그림을 그린다 한들 우수 작품으로 선정이 되겠나 싶은 마음에 번거로울 것 같아 꼭 참가해야 해? 말하려 했는데 그림을 제출하기만 해도 2인분의 고기를 준다고 쓰여 있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식당에서 주고 싶다고 통사정하는데 안 받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아들에게 "하고 싶으면 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하겠다는데 뜯어말리지는 말아야지 싶기도 했고 제출만 하면 주겠다는 고기를 진짜 줄까? 호기심도 일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면서 그림대회에 참가할 수 있느냐 묻자, 직원은 그림을 그릴 종이와 함께 그림에 꾸미라며 스티커도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손발을 씻자마자 종이를 붙들고 몰두하는 아들. 금세 다 그린 후 내게 잊지 말고 그림을 꼭 제출해 달라고 당부했었는데, 5월 1일 마감이라 4월이 가기 전에 제출하자고 메모해 두고선 불현듯 오늘, 그림 제출을 아직도 안 한 게 떠오른 거다.


마침 비번인 남편.

아이들을 센터에서 픽업해 데려오는 길에 식당에 들러 그림을 제출해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고, 아이가 식당에 들어가 그림을 가지고 왔다 했더니 정말로 돼지갈비 2인분을 포장해서 아이 손에 쥐어 준 것이었다. 봉투에는 영수증 대신 그림이벤트 돼지갈비 2인분 36,000원이라고 쓰여있었다.


아들은 매우 뿌듯한 표정이었다.

고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누나는 동생에게 이미 "와, 고마워. 집에 가면 잘 먹을게."라는 인사를 했단다. 숯불 향이 솔솔 나는 고기도 고기였지만 생산적인 일을 해냈다는 아들의 그 표정이 어찌나 귀엽고 늠름하던지 모른다.





옹알옹알 옹알거리며 바운서에 비스듬히 누워, 높지 않은 곳에 달려있는 장난감 모빌을 바라보며 팔이 짧아 손도 안 닿을 거면서 바둥바둥 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아기가 이리 커서 엄마, 아빠, 누나랑 함께 먹을 거라며 달뜬 기분으로 고기 봉투를 손에 꼭 쥐고 집 현관 비번을 누르며 들어와 "엄마! 내가 고기를 가져왔어!" 하고 당당히 외치는 모습이라니.


가끔 아빠가 사주는 외식에 더러 엄마가 시켜주는 배달음식에 그저 엄마, 아빠의 그늘 밑에서 항상 막둥이 역할만 하다가 자신이 한 턱 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한 끼를 자신 덕분에 즐겁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둘러보며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니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구운 고기 2인분에도 이렇게 가슴이 뭉클한데 10대에 이미 이름을 날린 악뮤 찬혁과 수현의 부모는 얼마나 감개무량의 연속일까.


더불어 어린이날 이런 뜻깊은 행사를 진행해 준 고깃집도 참 센스 있고 멋지다.

어린이날을 만드신 방정환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가정의 달을 맞아 지역 곳곳에서 이렇게 어린이를 아끼는 마음으로 베푸는 행사라니 참으로 의미가 깊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런 어른들이 많아진다면 다가올 우리의 미래는 참 밝을 것 같다. 아들의 뿌듯함에 겨운 표정을 볼 수 있게 해 준 그 고깃집 대박 나시길~ ^^ㅋ



아들이 가져온 고기는 포장을 열자마자 순삭... 사진 출처. 블로그. 여니남편의 맛집 투어




*아기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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