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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l 29. 2024

옛날엔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었지

사슴을 닮은 슬픈 섬 (소록도)

내가 일곱 살 때였나, 여덟 살 때였나.

당시에는 인신매매가 횡행하던 시대였다.

길에서 제 갈 길 잘 가는 여자를 잡아다가 좀 예쁘다 싶으면 사창가로 팔아넘기고, 좀 아니올시다면 온종일 마늘 까는 곳으로 보내 일을 시킨다고 했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남자는 퍽치기를 당하는 건 물론이고 질질 끌려가 너도나도 기피하는 원양어선을 태운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실제로 신안 염전마을에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산 증인이 방송으로 보도된 적도 있으니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흉흉한 소문들이 피부로 와닿을 때면 소름이 돋곤 한다.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잡아먹는다는 소문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식인종이 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좀처럼 믿을 수 없었는데 나병 즉 문둥병(한센병)에 대한 병증을 듣고 더 기겁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코가 없어지고, 또 자고 일어났더니 손가락 마디 하나가, 발가락 하나가 서서히 문드러져 없어진다는 증상... 만일 내가 그 병에 걸린 환자였다면 온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상상만 해 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슬펐다.


상실감을 끝없이 주는 이 나병을 앓는 환자들은 갖은 수를 써도 병이 낫지 않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간을 빼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흐릿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아이의 몸이 완벽히 담길 만한 커다란 항아리에 독한 술을 들이붓고 아이를 담근 후 우려낸 술을 마시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괴담 같기도 혹은 진짜 같기도 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어린 시절 나와 내 동무들은 신나게 놀다가도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폼을 잡으면 각자의 집으로 뛰어 돌아가기 바빴다.




갑자기 "소록도"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 이유는 요새 조정래 님의『태백산맥』을 읽고 있어서다. 나병 환자들이 소록도에 모여 살고 있다는 대목에서 나병에 대한 기억이 자동으로 소환되었다. 남북의 이념이 팽배하게 맞서 서로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역사 이야기도 솔깃하지만, 언젠가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옛날엔 그랬지." 하고 들려주시던 소소한 옛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아 무척 흥미롭다.


결혼 전 태백산맥 10권 전권을 분명히 정독하여 읽었다.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마침표까지 빼놓지 않고 꼼꼼히 눈에 새긴 후, 다 읽어냈다는 감격으로 두꺼운 책표지를 살포시 덮은 기억까지 난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알짜배기 알맹이는 누가 쏙 빼간 것 마냥 주인공 이름만 겨우 떠오를 뿐 기억나는 내용이 몇 없다. 처음 접하는 책을 새롭게 읽는 느낌이다. 새 책 읽듯 5권까지 찬찬히 읽고 지금 6권을 읽는 중인데 백남식 사령관과 에게 호감을 느끼는 말자의 소록도 데이트가 흥미로워 일부를 소개하려 한다.




백남식 사령관과 말자는 소록도로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말자는 자유연애로 행여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여 동행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백 사령관에게 이 여행은 자신보다 더 능구렁이 같은 말자 엄마의 유혹을 떼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따라서 여행은 그녀의 딸을 범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백 사령관이 말자에게 이름이 왜 "말자"냐 묻고, 위로 언니들이 많아 이제 딸은 그만 낳자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소록도에 도착하니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소록도는 마치 부자들의 별장지대 같을 뿐, 한 많은 나병 환자들을 품고 있는 슬픈 섬처럼 보이지 않는다.

백남식은 경치에 감탄하는 말을 쏟아내지만 말자는 사뭇 다른 감정을 느낀다.


"이 바닷물이나 섬이나 다 슬퍼요."


백남식이 되묻는다.


"슬퍼?"


"네에, 저 섬에 있는 나환자들이 이 바닷물에 많이 빠져 죽거든요."


"그건 슬픈 게 아니라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일이군."


여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도 백남식은 참으로 재수 없음에 방점을 찍고도 남을 텐데 한없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기어이 한 마디를 더 보탠다.


"그럼 이 물에 어떻게 해수욕을 해."


눈을 휘둥그레 뜬 말자는 그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 『태백산맥』 6권 중에서 =


소록도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 오색 분수대



위 이야기를 읽으면 백 사령관을 세상에 다시없을 비정한 사람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어떨까.


하나의 현상을 두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요새 흔히 테스트하듯 말하는  "나 우울해서 빵 샀어"에 대한 말을 듣고 "왜 우울한데?"하고 대답을 하면 감성적인 성향으로 보고, "어떤 빵을 샀는데?"와 유사한 답을 하는 사람은 이성적인 성향의 사람으로 보는 것처럼. 감성과 이성의 요소만으로도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는데 열린 조건 하에서 여러 분야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을 한다면 그 해석은 셀 수 없이 많은 경우가 나올 것임은 두 말하면 입이 아프다.


한데 나와 다른 대답이나 태도를 취하는 상대를 만나면 우선 경계 태세를 갖는 경우가 많다. 때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도 한다. 상대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일 뿐임을 아는데도.


같은 상황이나 입장에 처했지만 살아온 환경, 부의 정도, 그가 가진 가치관과 철학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거나 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님을 우린 이제 너무 잘 알고 있다.



슬픈 영화를 함께 보면서 어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느냐며 냉혈한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허구한 날 우는 사람에게 뭐 그리 울 일이 많으냐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태백산맥의 대화 내용 중 볼드 처리한 글씨는 태백산맥 6권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한센병은 과거에는 불치병이었지만 요즘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완치가 가능한 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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