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아하는 닌텐도 게임, TV 시청, 유튜브를 모두 물리치고 책을 부단히 읽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기에 책 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책을 읽음으로 해서 책에 든 교훈을 얻는 건 차치하고라도 우선 전자제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블루라이트를 안 보게 되고, 바보상자를 들여다 봄으로써 동시에 뇌가 바보가 되는 것을 독서로 막을 수 있으니 책이든 만화책이든 독서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이다.
나 어릴 적 초등학생 때는 여름방학이든 겨울방학이든 뭔 놈의 방학숙제가 그리도 많던지.
그리기 1점, 만들기 1점, 매일 일기 쓰기는 물론이고, 곤충 채집도 해야 했고, 탐구생활이라는 방학 전용 교재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TV든 라디오든 탐구생활에 맞춰 나오는 교육프로그램을 들어야 했다. 그러니 여행을 즐겁게 다녀와도 밀린 일기와 탐구생활 기록을 하느라 허덕였다. 한데 요새는 방학 숙제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없다. 일기는 사생활 보호 차원으로 없어진 지 오래고, 곤충의 생명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곤충 채집도 방학 숙제에서 사라졌으며 왠지 모르지만 그리기나 만들기 숙제도 없다. 숙제라고 해봐야 독서록이 전부.
방학식날 생활통지표와 안내문을 받아 오는데 특이사항이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숙제라곤 독서록뿐이다. 그것도 주 2회. 학업을 놓는다는 의미의 방학이란 말답게 공부는 아주 제대로 손을 놓는 기간이구먼. 어린이가 성장할 때 놀이가 큰 몫을 해내고 평소 학기 중에는 공부하느라 놀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이렇게 제대로 멍석을 깔아주고 "신나게 노세요" 하니 지켜보기엔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런데 나의 우려와는 반대로 막둥이가 스스로 알아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책만 읽고 끝내는 것도 아니고 독서록까지! 하루에 한 권도 아니고 두 권을!
흐음... 쟤가 왜 저럴까... 너무 더워 더위를 먹은 걸까. 아니면 벌써 철이 든 건가? 어른 중에도 철 안 든 사람이 많던데 꼬꼬마 쟤가 갑자기 철이 제대로 들었네. 공부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달은 걸까. 이상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며칠이라도 저리 책을 읽고 독서록을 쓰면 아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 될 일이 없을 테니까.
7월 22일에 방학식을 하고 오늘이 8월 9일이니까 거의 3주 동안 막둥이는 하루에 2권의 책을 읽고 2건의 독서록을 남겼다. 지난번에 읽은 책 "안네의 일기"는 내가 읽고 있는 "태백산맥"의 활자보다 심지어 글씨 크기가 작았으므로 결코 적은 양의 독서는 아니다. 독서록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하고, 책을 읽으려면 TV를 꺼야 했기에 아들은 유튜브를 보다가도 스스로 정한 시간엔 알아서 TV를 끄고 "책 읽어야~~ 지~" 하며 손에 책을 들었다. 눈만으로 잘 읽히지 않을 때는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어도 지루할 때는 어느 유튜버의 성대모사까지 하며 읽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재미없는 개그프로그램인가. 아주 가관이었다. 하지만 보기엔 좋았다. 독서라는 건 어쨌든 아이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니까.
너무 열심히 하는 아들을 본 후 우리 딸은 뭘 하고 있나 고개를 돌려 바라봤더니 역시나 휴대폰 삼매경이다. 센터에서 내주는 수학 숙제며 영어 숙제를 모두 끝냈다 했지만, 왜 공부시간은 짧고 휴대폰 보는 시간은 길게 느껴지는 건지. 초등학교 5학년 짜리가 책 읽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 옆에 중 1 누나는 휴대폰 보느라 정신 팔린 모습을 보니 괜히 비교가 된다. 비교라는 건 절대 나쁜 것이고 따라서 비교발언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은 뇌보다 빠르다.
"딸~ 지후 책 읽는 거 봐. 저렇게 오랜 시간 정말 대단하다 그렇지?"
'동생은 책 읽는데 누나가 돼서 지금 휴대폰이 눈에 들어오냐?'라는 매우 직설적인 말을 귀에 때려박고 싶었지만 그나마 조금 순화해서 돌려 돌려 말했다. 엄마의 말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 감을 잡은 딸은 약간 찔렸는지 동생의 방학계획표에 딸린 방학숙제를 슬쩍 보았다. 그러더니 동생에게 꾸짖듯 말했다.
"야! 너 하루에 독서록 2개 했어? 주 2회 독서록인데 왜 하루에 2개를 해?!"
그제야 책을 읽느라 고개를 숙인 아들의 머리가 스르르륵 슬로우 화면처럼 올라가더니 누나를 보며 얼굴표정이 서서히 변한다. 눈알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눈은 점차 커지고 입은 점점점 크게 벌어져 제 주먹이 들어갈 것처럼 떡 벌어졌다.
헐...
누나가 쐐기를 박듯 하는 말
"이 바보야!"
.
.
.
그랬더니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안 한 거보다는 많이 한 게 낫지. (네 얼굴 표정은 왜 전혀 나아 보이지 않는 거니?)"
하며 애써 스스로 위로하는 말을 하고, 읽고 있던 책에 다시 눈을 고정했다.
어얼~~~ 정신 승리!
네가 진정 승자다!
딴엔 머리를 써서 현진건 단편집 1권에서 독서록 2개 숙제를 해치우기도 했다.
뒤늦게나마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독서록을 그만할 법도 한데 약 3주간 하루 2번씩 내내 독서록을 써버릇하더니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