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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개 Oct 06. 2022

스컹크 헬

Together Moshing - Spiky Brats

 스컹크 헬은 상수역 극동방송국 근처에 있던 펑크 공연장이다. 지금은 DGBD로 이름을 변경한 드럭이나 이대의 하드코어 같은 공연장이 분명 한국 펑크 / 하드코어 역사의 시작점임에 분명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펑크를 경험하지 못했다. 견해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스컹크 헬 시대부터 조선펑크에서 벗어나 좀 더 본격적인 한국 펑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포고, 77 펑크, 스트릿 펑크, Oi, 하드코어 등 펑크와 스킨헤드 하위문화의 줄기가 뻗어 나면서 한 자리에서 각자의 멋을 자랑하며 멋진 밴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외 각국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결과였을 수도 있지만 몇 해 뒤 펑크 씬은 나뉘게 되는데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 어쨌거나 이 시절의 스컹크 헬은 정말 뜨거웠다. 내 19세의 겨울, 그 첫 경험의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이사와 전학을 오고 나서 한동안 따분한 학교와 동네의 일상이 지속되었다, 좋은 담임을 만나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고 강남역의 신나라 레코드에 가서 국내 정발 된 해외 밴드들의 신보를 사거나, 홍대 퍼플레코드나 신촌 향뮤직을 기웃거린다. 퍼플레코드는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는 앨범들을 주문하여 구매할 수 있었고, 향뮤직에서는 퍼플 레코드와 마찬가지로 국내 인디 밴드들, 특히 펑크밴드들의 앨범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때 구매한 <98년 펑크 대잔치>, <3000 PUNK> 같은 앨범들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홍대 펑크 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직설적인 가사, 단순히 청춘이나 젊음 같은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더 어둡고 진한, 화가 나있고 날서린 그들의 에너지에 나는 경도되었다. 나 또한 너무 화가 나있었던 십대의 젊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The Clash 나 Sex Pistols 같은 밴드들은 알고 있었지만 나와 동시대에 이 땅의 젊은이들이 펑크 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나도 그곳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그동안 이 세상에서 뭔가 해내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기성세대의 세계는 부조리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저 세계관의 어디에도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평범하고 고리타분한 어른이 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방향성을 잃은 채로 나의 내면에서 끓어 넘쳐버릴 것 같던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 나는 그렇게 내 삶을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문화와 삶의 공간을 찾은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돌아오는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태어나서 처음 펑크 공연장을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기대가 교차했다.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할지도 가서 사람을 사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저 며칠간 내가 가진 그들의 앨범을 귀에 피가 나도록 듣고 또 들었다.

 토요일, 도전의 날이 왔다. 무조건 닭머리나 스파이크 머리를 해야만 하는지 며칠간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다. 나는 그 당시 말머리를 하고 다녔었는데, 학교에서는 날라리 녀석들이 머리 어디서 했냐고 물어볼 정도로 꽤 튀는 스타일이었지만 교칙에 크게 위배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닭머리라던가 또는 스파이크 스타일을 하기 위해 장발을 기른다거나 하는 것은 무리였다. 역시나 학교를 자퇴해야 하나? 이런 바보 같은 고민을 했던 적도 있었다. 찡 박힌 가죽 재킷이라던가 본디지 바지 같은 것을 입어야만 공연장에 갈 수 있는 것일까? 그 후로는 그냥 교복 차림으로 스컹크 헬에 가곤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귀여운 고민을 하던 시간이었다. 고민 끝에 그냥 예전에 사둔 적 있는 찡 팔찌 하나만 차고 홍대 스컹크 헬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한남동 단국대 앞에서 내려 한강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상수역에서 내리면 바로 스컹크 헬이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렇게 갔던 적이 없었다. 항상 을지로에서 내려 2호선을 타고 홍대입구역까지 간 후 천천히 걸어서 스컹크 헬까지 걸어갔다. 나는 당시의 홍대 거리가 좋았고 빈둥대며 홍대 골목 구석구석을 걷다가 스컹크 헬이나 놀이터로 향하는 주말의 일상은 수년 간 지속되게 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스컹크 헬의 정확한 위치조차 몰랐다. 분명히 집에서 약도를 보고 나왔지만 미로 같은 홍대 거리에서 머릿속의 약도는 이미 날아가버렸으니 말이다.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을 때 강력한 포스를 뿜으며 걸어가는 한 무리의 스킨헤드와 펑크족이 보였다. 실제 펑크족과 스킨헤드들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찡 박힌 가죽 재킷과 잔뜩 성이 난 듯 뿔처럼 삐죽삐죽 솟아오른 머리카락, 빡빡 민머리에 멜빵, 리바이스 청바지, 팔뚝에는 엄청난 문신들, 태어나서 만나 본 가장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던 그들의 뒤를 몰래 미행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역시 스컹크 헬. 다행이다! 스컹크 헬 앞에는 앞서의 무리들과 비슷한 포스의 그룹들이 각자의 스타일을 뽐내며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있었고 각지에서 거대한 담배연기의 구름을 만들고 있었다. 무섭게 생긴 외국인들도 엄청 많았고 반면에 생각보다 평범한 차림의 사람들도 꽤 많았다. 순간 내가 차고 있는 찡 팔찌가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 아무도 안 볼 때 빼서 가방에 넣어버렸다. 어쨌거나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저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채로 티켓팅을 했다. 무서운 차림의 누나가 친절하게 해골 문양의 도장을 내 손등에 찍어줬다. 이후 나는 한동안 이 해골 문양의 도장을 좋아하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지질하지만 당시에 뭔가 내가 펑크 공연장을 다녀왔다는 표시가 찍혀있는 것 같아 스컹크 헬에 다녀온 날이면 손을 잘 씻지 않았고 수요일 정도까지는 해골 자국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이다.

 공연장 안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가득 차있었고 첫 번째 밴드가 세팅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하고 시답잖은 농담들을 했다. 서로 친한 무리들도 많았고 나처럼 조용히 공연만 보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맨 뒤쪽에 서있었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엄청난 소음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고막이 나갈 것 같은 느낌과는 달랐다. 귀도 귀지만 앰프에서 터져 나오는 소음이 내 심장부터 온몸을 두들겼다. 사람들이 주먹질을 시작한다. 발길질도 해대기 시작한다. 살짝 놀랐지만 우습게 여겨지기 싫어서 한껏 인상을 쓰다가 어느새 압도되어 입을 벌리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그 장관을 바라본다. 생전 처음 겪는 라이브의 느낌, 생전 처음 보는 슬램과 모슁의 광경. 중앙 기둥 주변에서 둥글게 혹은 좌우로 뛰어다니면서 터져 나오는 밴드의 연주에 맞춰 팔다리를 휘두르며 서로의 몸을 부딪히는 사람들, 스테이지 바로 앞 다찌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댄 채 자신의 등에 강하게 부딪히는 슬래머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머리를 격렬하게 흔드는 사람들, 맨 뒤에서 의자에 앉거나 서서 팔짱을 끼고 조용히 공연을 즐기다가 격렬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슬래머들을 다시 앞으로 강하게 밀어버리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만의 리듬으로 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도 그 후 학교에서도 한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날의 감상에 압도되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눈과 귀와 심장과 온몸을 두들긴 그 압도적인 느낌은 그때부터 내 인생에서 친숙한 광경이 된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창 밖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 중대한 것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19세의 겨울, 강렬한 첫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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