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또 다른 기다림 20210402
며칠 전에 마음속으로 투정을 부린 일이 있습니다. 성급했음이 분명합니다. 지나고 나니 누가 듣지 않아서이 다소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나이 값을 못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더구나 민들레입니다. 민들레꽃 하면 어려서부터 눈에 익숙합니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도 했으니 하는 말입니다. 꽃을 따서 나와 동생의 귓바퀴에 꽂기도 했습니다. 홀씨를 따서 바람 부는 방향으로 하늘 높이 날리기도 했습니다. 줄기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민들레 싹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잎을 뜯어서 나물해 먹기도 했습니다. 쑥이나 냉이, 달래처럼 봄이면 친근하던 민들레에 대해 성급한 마음을 갖었습니다.
“올해는 어떻게 된 거야. 작년까지만 해도 그 많던 민들레인데 공원이나 길에서 보기가 어렵다니.”
일주일 전쯤 길 가장자리에서 납작 붙어있는 노란 민들레를 보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식물들이 싹을 내밀고 꽃망울을 부풀려도 공원에서 민들레를 보지 못했습니다. 애꿎은 공원 관리인들을 탓했습니다. 인원수가 많다 보니 공원의 풀들이 자랄 사이도 없이 깎아버려서 그렇다는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아주 틀린 생각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년에 비해 정말로 풀들이 마음껏 자랄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가을로 접어들자 호숫가의 갈대와 부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공원 나무들의 가지치기도 했습니다. 낙엽을 밟으며 낭만을 즐길 사이도 없이 떨어지는 족족 갈퀴로 긁고 빗자루로 쓸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까치와 비둘기를 제외한 새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요즈음까지도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제 바깥나들이를 한 아내가 말했습니다.
“벚꽃이 벌써 만개했어요.”
“아니?”
며칠 전만 해도 벚나무는 따스한 햇살에 꽃봉오리를 통통하게 불리고만 있었습니다. 아내의 말이 맞습니다. 아파트 입구의 벚꽃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하늘이 하얗습니다. 개구리 알을 연상시키듯 꽃들이 옹기종기 큰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찻길을 건너자 길 가장자리를 따라 민들레의 꽃들이 올망졸망 노란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공원의 양지바른 비탈에는 어릴 때 보아 왔던 국군 장교의 외투 단추처럼 금색을 띤 꽃들이 작은 군집을 이루고 있습니다. 민들레, 민들레, 민들레……. 벚꽃과 민들레는 꽃이 피는 시기가 일치합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앵두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아기 사과꽃도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나는 요즈음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봅니다. 기온의 변화에 따라 개화의 시점은 조금은 다르지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피어난다는 것을 왜 인식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기상대 예보관의 말에 의하면 올해는 벚꽃의 개화 시기가 구십 년 만에 제일 빠르다고 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십사절기를 잘 따지는데도 말입니다.
오늘은 며칠 동안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민들레를 비롯한 여러 꽃과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가까이했습니다. 해마다 보는 꽃이지만 갓 피어나는 것들을 보면 새로운 감정이 듭니다. 내가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호숫가의 갈대와 부들, 공원의 나뭇가지가 허전해서 새들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기다림이 부족해서인지 모릅니다. 민들레꽃이 어느 순간 별처럼 나타난 것과 같이 새들도 때가 되면 몰려올지 모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호숫가의 풀들이 하늘을 향해 빨리 자리기를, 공원의 듬성듬성한 나뭇가지들에 새싹이 대나무 죽순만큼이나 빨리 자라기를.
나는 기다림에 익숙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가 봅니다. 기다리다 보면 지난해에 보아왔던 여러 종류의 새들이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삶이란 자체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의도적인 기다림도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기다림이 태어남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긴 끈으로 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 끈이 늘여놓은 곳을 따라 ‘희로애락’을 짊어지고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의 끝은 알지만, 과정은 잘 모릅니다. 같은 듯 같은 듯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