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서울에서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일주일 중 4일은 서울에서 지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부모님의 집에서 잠을 자고 서울에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하는 건데 뭉뚱그려 ‘서울에서 지낸다’고 말하게 되네요. 부천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부, 일, 사람, 그 밖에 살면서 내가 이루고 나에게 남은 것 대부분이 서울에 있습니다. 대구로 이사 오기 전까지 서울사람으로 17년을 살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고향인 부천이 오히려 낯설고 재미도 없고, 그래서 집에 가면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딱 잠만 자는 곳이 되었습니다. '부천에서 지낸다'라고 하기 어색하네요.
대학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 하나는 처음에 전주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고향이 전주인 줄 알았죠. 몇 년 후에 친구의 고향집은 부안에 있고 전주에서 지내며 중‧고등학교를 다닌 거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친구가 왜 나에게 고향을 속였을까, 하고 말입니다. 결국엔 지방 소도시 출신인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알만한 인근의 큰 도시로 대답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서울사람이 아닌 지금은 온전한 체감을 통해 납득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부안의 고향집에 가면서 전주에 간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대구사람들에게 부천의 부모님 집에 가면서 ‘서울에 간다’고 하니까요. 부천이라고 하면 거기가 어디냐고 되물을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누구를 만나고 어딘가를 찾아가서 일을 보는 건 모두 서울에서 이루어지도 해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죠.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낸 사람들과는 그럴 필요가 없죠. 정확한 지명을 씁니다. 친구는 부안, 나는 부천. 게다가 친구는 이제 내가 부천에 간다고 해도 누군가와 약속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서울에서 만나겠지’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왜 서울사람인 척 고향 세탁을 하느냐고 할까 봐, 그 정도의 오해와 비난에도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마음에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중요한 건 서울에 있는 회사에서 주 4일 근무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백수 생활 2년 반. 돈을 벌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진작 넘어섰습니다. 뭐든 해야 하기 때문에 대구에서도 멀고 서울에서도 먼 강원도에 있는 대학교의 시간강사 자리를 구했는데, 학기 중에만 받는 주 6시간 강의료는 생활비로 택도 없죠. 그래서 방학기간 동안 다른 일을 더 해야겠다 싶던 차에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와 고민 없이 수락했습니다. 20년을 성실하게, 우리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고3 공부하듯이 일했지만 파이어족 비슷한 것도 언감생심인 처지입니다. 가진 돈을 전부 생활비로 쓰면서 살다가 죽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평생 돈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서 조금 먹고 조금 쓰면서 사는 건 익숙하거든요.주거비는 제외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살든 어쩌든,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잡아도 있는 돈으로는 환갑을 넘길 수 없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되네요. 오래 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내 몸이 너무 멀쩡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누가 억지로 시킨 거 아니고 내가 그렇게 살았는데요. 내가 일하던 업계는 일이 어려워서 숙달되는데 오래 걸리고, 워라밸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많은 일을 해야 하지만 연봉은 그해 비해 전반적으로 낮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전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회사들마다 경력자들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그 자리를 메꾸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와 마찬가지가 되었죠. 이번에 내가 일하게 된 회사도 경력 많은 정규직 직원이 필요한데 도저히 못 구해서 나를 찾은 겁니다. 대구에 있는 나에게, 주 4일 근무를 잠깐이라도 해달라고 할 정도로 근무여건이 척박한 업계에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주 4일 근무가 실제로는 5일 치 일을 4일 동안 하는 게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대출금 생각은 마음 깊숙이 묻어 두고 생활비나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올 한 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월 1일에 대구에서 영등포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고속철도를 대충 계산해도 2백 번 넘게 타본 바, 열차가 정시에 도착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단 이삼 분이라도 늦죠. 이번 겨울 들어 고속철도나 전철이나 할 거 없이 코레일 운행에 크게 차질이 생겨서 승객들이 고생했다는 뉴스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열차가 많이 지연되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기차가 완벽히 제시간에 도착하네요. 뭔가 예감이 좋아서 1호선 전철 승강장으로 서둘러 갔더니 마침 급행열차가 들어오는 겁니다. 일반열차에 비해서 5분 정도 빨리 부모님 집이 있는 송내역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거죠. 기쁜 마음에 숨을 헐떡이며 전철에 타니 빈자리가 없었지만 그게 당연하기 때문에 서운하지는 않았고, 제일 끝자리에 앉은 사람 앞에 섰습니다. 숨을 고르며 멍하니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면서 다음역인 신도림에서 앞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무거운 배낭을 무릎에 올려놓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올해 내 운을 전부 다 썼겠는데.’
내 인생에 덤이라는 건 없고 내가 노력한 만큼 손에 쥐기만 해도 다행이라서 말입니다. ‘에이, 뭐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비운의 주인공으로 여기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죠. 소소한 행운이 바닥나고 커다란 비운이 닥쳤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코로나에 걸리면서…….
< 서울 근무지 건물의 옥상에서 바라본 도심 풍경 >
서울의 하루 신규 확신자 수가 오천 명을 넘는 상황에서 도심의 대형건물에 있는 사무실, 점심시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한 식당. 출근 첫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면 이상하겠다고. 일터인 서울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보겠다고 어슬렁거렸던 서울과 너무 달랐습니다. 그렇지, 서울이 원래 이렇지. 백신을 3차까지 맞기는 했지만, 내가 여태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건 바이러스를 이겨내서가 아니라 피했기 때문입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사람 많고 좁은 곳에는 잘 가지 않았으니까요. 코로나 시대에 백수의 가장 큰 장점은 식당이든 카페든 한적할 때를 골라서 갈 수 있다는 데 있죠. 서울에서 일하며 무사히 지내기 위해 쉬는 날이 되면 바로 백신을 맞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미처 백신을 맞기도 전에 회사 내 밀접접촉자 중 한 명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출근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죠. 그때부터 코로나 증상이 나타나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부모님이 걱정돼 집에서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따로 있으면서 조심했습니다. 증상도 없고 자가진단 키트 검사결과 음성이었는데 첫 주 근무를 마치고 대구의 집에 돌아오자마자 목이 아프기 시작하더군요. 혹시 모르니 밖에서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괜히 내가 좋아하는 카페와 식당에 찾아갔다가 바이러스를 퍼뜨리지 않도록.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빨리 나아서 멀쩡한 상태로 월요일에 출근해야겠다 싶었고요. 약국에만 잠시 들러서 감기약을 사다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인후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이건 그냥 감기가 아니다’라는 확신이 드는 정도가 되었죠. 그리고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 자가진단 키트에서 결국 양성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지 않고 동네 병원으로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어쩌나, 코로나가 맞네요. 코로나 감염열차 막차를 타셨습니다.”
다행히 인후통 외에는 가벼운 감기 증세만 있고 열이나 근육통은 없었기 때문에 자가격리와 함께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계의 성능을 사람의 능력에 비유한다면 회사에서 쓰는 컴퓨터가 성인, 작고 느린 나의 노트북은 초등학생 정도가 되겠습니다. 애초에 취미용으로 장만한 노트북이니까요. 시스템을 업데이트하고 프로그램을 설치하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고, 그러고 나서도 작업속도는 너무 느려 진땀이 나고, 회사 안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일 하느라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근무시간 중인데 회사에서 아무 연락이 없어 마냥 기다리기도 하고 부족한 작업량을 보충하느라 밤늦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있기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거의 되돌이표였습니다. 메신저와 전화로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나란히 앉아서 같이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더군요. 정신없기만 한 채로, 조금은 빌런이 된 것 같기도 하면서, 둘째 주의 재택근무가 끝났습니다.
이후로 남은 3일의 격리기간 중에 병원과 약국에 잠시 들러서 달라진 증상에 맞는 약을 더 처방받은 것 외에 집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확진받기 전부터 해서 열흘 동안 격리하게 된 셈이죠. 예상외로 답답함은 거의 못 느꼈습니다. 목만 아픈데도 온몸이 다 늘어지고, 일을 할 때에는 정신이 없고 일을 안 할 때에는 무기력했습니다. 햇볕을 못 쬐어서 우울해질까 봐 걱정했는데, 그보다 격리기간 동안 싹 나아서 다시 출근하면 일에 지장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초조함이 더 컸던 모양입니다. 의외로 코로나 때문에 가장 심하게 가장 오랫동안 겪은 불편은 맛을 못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목이 아파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즉석식품들이 맛이 없어서인 줄 알았죠. 쉽게 에너지를 얻으려고 먹은 초콜릿이 몸서리치게 달기만 하고, 조미료가 들었을 게 분명한 즉석국 맛이 밋밋할 때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인후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모처럼 커피 맛을 즐겨보려고 맛있는 원두를 핸드드립 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깨달았죠. 이 커피가 이렇게 신맛만 왕창 날 리가 없는데, 내가 맛을 제대로 못 느끼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맛을 못 느낀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오히려 맛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졌습니다. 그래봤자 커피와 커피랑 곁들여 먹는 것들이지만요. 음식은 이러나저러나 별 상관없는데 동네에, 집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너무 절실했나 봅니다. 많이 먹어서 잘 아는 맛이니까 맛을 못 느끼는 상태에서 먹어도 원래 맛이 떠올라 맛있지 않을까, 어리석은 생각을 했네요. 동네 카페 사장님들 중에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언젠가 비어 있는 우리 집에 난로가 켜 있는지 출근길에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 카페 “노 모어 커피”의 사장님에게 퇴근길 배달을 부탁했습니다. 사장님은 곧바로 내가 주문한 원두와 뱅쇼, 스콘 외에도 케이크와 커피 드립백, 유자청 등 맛있는 걸 종류별로 챙겨서 우리 집 문 앞에 두고 갔습니다. 쿠팡맨처럼 현관문 앞에 놓인 배달물품의 인증샷을 남기고 말이죠.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그 맛이 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유자차를 마시니 몸이 풀리고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니 기운이 났습니다. 내 취향에 맞는 진한 드립백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좀 차렸네요. 그리고 나머지 것들을 격리가 끝날 때까지 아껴서 먹었습니다. 다만 너무나도 맛있을 게 분명하고 그만큼 비싼 게이샤 원두만은 미각을 회복한 후에 먹으려고 남겨두었습니다.
맛을 못 느낄 줄 알면서, 카페 사장님에게 민폐인 걸 알면서도 배달해 달라고 했던 건 맛있는 걸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그리워서였던 것 같습니다. “집안에만 있는 게 답답하지 않은 것”과 “카페에 가고 싶은 것”은 바로 연결되지 않는 조금 다른 차원의 상황으로 느껴지는군요. 카페에 가는 것이 단지 집 밖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맛있는 커피와 좋은 카페가 나에게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나 봅니다. 당연하게 매일 해야 하는 일과라고 할까요. 대구에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하지 않고 놀면서 소비만 하는 관광객에 가까운 생활이라 더욱 그렇겠죠. 생각해 보니 대구에서 얘기를 많이 나눈 사람들은 전부 카페 사장님들이네요. 앞으로도 돈독한 “사장님-손님 사이”가 계속되도록 내가 훌륭한 소비자가 되어야겠습니다.
< 카페 '노 모어 커피' 사장님이 배달해 준 종합선물세트 >
다시 출근한 셋째 주에는 여전히 남은 약간의 코로나 증상 때문에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가급적 마스크를 벗지 않으며 조심했고, 회사생활은 초기화된 듯 어색했다가 이내 적응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감염경로를 추적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회사 내에서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행이었습니다. 내가 일부러 소홀한 게 아니었더라도 월급만큼 일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더군요. 전철 막차를 타고 퇴근하면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습니다. 그렇게 첫 출근 같은 셋째 주를 보내고 맞은 설 연휴 동안 원 없이 동네를 산책하고 좋아하던 카페들, 식당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커피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사장님들하고 인사할 때마다 올해 처음이라며 감격했죠. 대구에 산지 4년 반. 익숙할 만큼 익숙해져서 조금 심드렁해질 무렵이었는데 다시 새삼스럽고 애틋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겨울이라 추워서 오래 돌아다니지 못한 게 오히레 다행이었습니다. 봄가을, 좋은 계절이었다면 집에만 있어야 했던 날들이 얼마나 아까웠을까요!
얼렁뚱땅 1월 한 달, 일 년 중 12분의 1을 보내고 나서 이제 대구에서 쉬는 3일 동안 늘어져 있지 않고 알차게 보내는 생활패턴을 만들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일어날 줄 몰랐던 일이 아직 남아 있더군요.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일을 더 하던지,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는 내 월급만큼 일을 더 많이 수주해야 하는 것이고, 혼자서 하고 있는 일 하나만 마무리될 때까지 하던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나는 주 4일 근무하는 2~3개월 단기계약으로 합의를 봤다고 생각했고, 회사는 시작은 그렇게 해서 결국은 정규직이 될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사실 2~3개월 일해서는 프로젝트 담당자가 될 수 없습니다. 손 좀 댔다가 떼는 정도라고 할까요. 그래서 보통은 그 정도 일을 맡기려고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있는 직원들이 더 감당하면 되는 거니까요. 나는 '단기 계약직 업무 효율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나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방점이 있었던 겁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습니다. 둘이 마주 앉아서 각자 갖고 있는 카드를 내밀며 더하기 빼기를 해서 나오는 숫자에 합의를 한다고 해도 결국 한쪽은 완벽히 수긍할 수 없는 거죠. 나는 회사의 입장을 빠르게 이해했고, 다시 전업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며 대학교 강의를 하고 싶기 때문에 지금 혼자서 하고 있는 프로젝트만 마무리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려니 당분간 일이 많지 않아서 출근하지 않고 그 날짜만큼 계약기간 이후에 강의와 병행하면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회사가 갑질을 한 게 아니고 내가 일을 “조금만”하고 싶어서이니까 서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내 역할에 대해 한계를 두고 있는 게 회사입장에서는 일에 대한 성의가 부족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기 때문에 대표님하고 웃으면서 얘기를 나눴고 계약조건을 변경하는 것도 내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회사에서 나한테 주는 월급이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출근할 줄 알았던 월요일에 대구의 집에 있으니 기분이 가라앉습니다. 내가 한 달 동안 한 일이 내가 받는 월급만큼은 안 된다고 평가받은 건 분명하니까요. 야근을 얼마큼 했다, 코로나에 걸린 게 내 탓이 아니다, 이제야 회사의 업무시스템에 익숙해지고 직원들과도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게 되었다는 그런 말들은 다 핑계일 뿐입니다. 내 노동력의 가치는 얼마큼 일을 해야 인정받는 걸까 생각하니 조금 착잡하네요. 그런데 뭐, 한동안 생각 좀 하다 말 겁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겠죠. 있어야 하는데…….
벌써 2월의 둘째 주가 시작되었고 입춘도 지났습니다. 일 년이라는 시간, 계절, 24 절기는 매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들어맞게 반복되는데, 나는 이 나이를 먹도록 살았어도 바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네요. 풍파에 실려 다니듯 보낸 지난 한 달, 일 년 중 12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을 아쉬워만 할 게 아니라 남은 열한 달을 잘 보내야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이 직업이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