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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월 Feb 17. 2023

만나고 헤어지는 일

[ 수필 ]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정확히는 내가 너를 처음 찾아간 게 언제였더라……. 3년이 넘은 건 분명한데 말이야. 아, 시월이었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었고 눈부시게 쨍한 하늘도 서늘하게 흐린 하늘도 아니었지. 비도 바람도 없이 아주 적당한 날씨였던 걸로 기억해. 늦잠 자고 일어난 사람들이 한껏 차려입고 거리로 나서 느긋하게 배회하는 일요일이었고 나도 그 사람들 중의 하나였어. 맨날 허리에 고무줄 들어간 바지만 입다가 그날은 웬일인지 공주님 드레스처럼 풍성하게 부푼 하늘색의 샤스커트를 입었잖아. 어쩌면 나는 너에게 잘 보이고 싶었나 봐. 네 앞에서,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까.      


너는 멋있었어. 조금은 새침하게 느껴지고 멀리서 보았던 모습과 살짝 다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멋있었어. 뭐가 그리 멋있다는 건지 묘사할 것도 없을 만큼 특별히 치장하지도 않았는데,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 그 자체로 멋있었어. 신기하게 성격도 보이는 것과 비슷하더라. 밝고 친절한데 부담스럽지는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게 느껴졌. 네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금방 깨달았지. 내가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너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조금 자신이 없기도 했어. 사실 너에게 다가가는 데에도 세 달이나 걸렸거든. 가끔씩 스치면서 너를 봤지만 인사를 건네지도 못했어. 너는 늘 빛이 나서, 그 앞에서 나를 드러내는 게 자신이 없어서 말이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동네로 이사 와서 일 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이방인 같았고 편하게 말 붙일 사람도 없을 때였어. 혼자 수없이 많이 걸어 다녀서 골목을 거의 외고 있을 정도로 익숙한데 너와 처음으로 마주 앉아서 창문 너머로 바라본 그 풍경은 그림 같고, 영화 같고 그렇더라. 흰색과 노란색이 섞인 듯한 햇살이 손에 잡힐 것 같고 알록달록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스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 너보다 창밖의 풍경을 더 오래 바라봤을 걸. 너는 거의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으니까. 그래도 좋았어.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너를 보면, 그저 말없이 있는 너를 보기만 하는데도 웃음이 났어. 그런 감정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잘 모르니 얼마나 오래갈지도 모르겠더라.     


그날을 떠올려보고 있어. 그때의 너, 창밖의 풍경. 너도 풍경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Kings of Convenience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아. 사실 처음 너를 만난 날 네가 Kings of Convenience를 들려줘서 무척 놀랐거든. 장르를 구분하자면 포크가 분명한데도 얼터너티브가 느껴지는, 날씨 안 좋은 북유럽의 회색 하늘 같은 음악을 하는 밴드잖아. 무겁고 우울한 음악을 좋아하는 나와 밝고 경쾌한 음악을 좋아하는 네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밴드가 있다는 게 신기했고, 인연인가 싶었고, 내가 점점 더 널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 후로 한동안은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너를 찾아가서 Kings of Convenience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았지.      



그래, 커피가 있었어. 우리 사이가 계속되었던 건 커피 덕분이잖아. 너는 종종 나에게 처음 맛보는 커피를 소개해줬지. 덕분에 나는 달콤하고 화사한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고, 발음하기도 어색한 단어들이 네다섯 개쯤 붙어 있는 커피의 긴 이름에서 각 단어마다 다른 맛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사실 아직도 정확히는 모른다. 너와 마시는 커피들이 매번 조금씩 다르게 맛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어느 흐린 날 너를 따라서 마셨던 카페라떼가 너무 맛있어서 그 이후로 날이 궂으면 꼭 라떼를 마셔. 우유맛이 커피맛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네 덕분에 알게 되었. 커피를 무척 좋아하고 매일 마셔서 커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게 민망할 만큼, 너는 나에게 새롭고 거대한 커피의 세계를 알려줬어. 아니, 내가 너의 그 세계로 들어간 거야.     


3년 3개월. 사계절이 세 번 지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나는 중이야.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 어떤 시간이 긴지 짧은 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니까 너는 다를 수도 있고. 어쨌든 나는 너를 알게 된 이후로 줄곧 네가 좋았는데, 너는 나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같이 커피를 마시고 특별한 날에 작은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겨우 한 뼘 정도 줄었던 것 같아. 네가 나에게 선뜻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원망은 안 했어. 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네게서 떼어놓을 수도 없고, 그중 몇몇은 나도 반할 만큼 멋진 사람들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나 역시 너에게 바짝 다가가진 않았던 것 같아. 처음에 내가 너를 찾았다는 이유로 나는 우리 사이에서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면책권 같은 걸 가졌다고 여겼나 봐. 그 사이 너 말고도 좋은 사람들이 몇 생겨서 너만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고.      


그런데 말이야, 다른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문득 네 생각이 났어.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낸 늦은 저녁에, 산책하면서 예쁜 하늘의 사진을 찍다가, 누군가가 네 얘기를 하는 게 들릴 때에도. 그럴 때면 곧장 너에게 달려갔는데 그때마다 후회하지 않았어. 너와 보낸 모든 시간이 좋았어. 생각해 보면 너는 늘 그대로였다. 언제나 나를 똑같은 정도로 반겨주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그저 내 마음만 커졌다 작아졌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 나를 특별히 좋아해 주지는 않았다는 거 알아. 나 아닌 누구누구를 특별히 좋아하는 지도 잘 알고. 솔직히 말해서 조금 서운하기도 했는데 네가 늘 그대로여서, 그대로일 거라고 믿어서 나도 늘 너에게 돌아갈 수 있었어. 고마워. 고마웠어. 평생 기억할 3년 3개월이 될 거야.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지만.     


결국엔 우리가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내가 먼저 널 떠날 줄 알았거든. 네가 떠나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서운한 것보다 네가 먼저 나를 떠난다는 게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컸어. 헤어지기까지 세 달. 어쩜, 우리가 만나는 데 걸렸던 시간이랑 똑같네. 그동안 한 번이라도 너를 더 만나서 조금의 시간이라도 하나의 기억이라도 더 남겨야 하는 건지, 인연의 끈이 갑자기 툭 끊어지지 않도록 서서히 멀어져야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일단 너를 찾아갔어. 너는 변함없이 멋있고 같이 음악을 들으며 마시는 커피는 맛있고 수백 번 바라본 창밖 풍경은 겨울인데도 따뜻했어.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고, 해가 바뀌고, 봄처럼 햇살이 포근한 어느 날에 정말 마지막으로 널 찾아갔지. 너를 눈에 담고 창밖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어. 애틋하다는 게 이런 마음일까…….     


얼마 전에 네가 떠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네가 있던 그곳을 찾아갔었어. 없는 줄 알았는데 정말 없더라. 여전히 겨울이지만 모처럼 춥지 않은 일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골목을 지나는데 나는 길가에 서서 너를 떠올렸어. 건너편에 네가 보이네. 그 앞에 내가 앉아서 이 쪽을 바라보고 있고. 우리가 함께 바라보던 창밖 풍경 속에, 내가 서 있었어.     


안녕, 나의 사랑!     


에티오피아 게르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카페라떼 든 밀크폼이 유난히 고운 걸 볼 때마다, Kings of Convenience를 들을 때마다 너를 생각할게.   




※ 자주 갔던 단골카페를 의인화해서 연서의 형태로 쓴 글입니다. 사람과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공간 간에도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좋아하던 카페가 먼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 카페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썼지만, 의인화하다 보니 감정을 과장하고 극적으로 표현한 측면이 있습니다.     


※※ 나의 사랑, 나의 카페, 사운즈 커피 삼덕점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카페입니다. 카페 사장님 아닙니다.


[ 사운즈  커피 삼덕점, 늘 앉는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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