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오월 Aug 26. 2023

갱년기 일기

[ 짧은 글 ]

< 달구벌대로의 해지는 풍경 >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섭니다. 볕이 들지 않으면서도 바깥보다 더 더운 집 안에서 종일 뭘 해도 집중이 안 되고 몽롱하더니, 눅눅한 여름바람이나마 쐬니까 개운하네요. 마침 지난 이틀 동안 비가 오다가 갠 하늘은 채도 높고 흰색이 섞인 밝은 파랑, “하늘색”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색 바탕에 흰색과 회색과 살구색이 섞인 구름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드넓은 하늘 어딜 봐도 그림 같요. 하늘을 거의 그린 적 없는 램브란트가 떠오르고 모네가 그린 그림 속의 바닐라 스카이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못 볼 뻔했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늘어져 있겠다고 버티는 부교감신경과 싸워 이기고 마침내 밖으로 나온 내가 무척 잘한 것 같습니다.


한낮의 열기는 다 식었고 바람도 살살 부는데 걷다 보니 점점 열이 오릅니다. 안 그래도 근래 들어 걸음이 부쩍 느려졌지만 땀을 흘리기 싫은 마음에 더욱 느리게 걷습니다. 다행히 해가 조금씩 내려앉을수록 바람이 서늘해지네요. 신천을 가로지르는 수성교에 다다라서 한숨 돌립니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달구벌대로 위로 주황색 노을이 번지고 있니다. 집에서 막 나왔을 때보다 좀 더 어두워졌고 더위는 이제 남아 있지 않. “저녁 바람에 걸을 만하다.”라고 친구에게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냅니다. 멀리 있어서 만나기 힘들지만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카톡으로 주고받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서로의 근황을 잘 알고 있는 30년 지기 . “앉아 있다가 일어났는데 어딜 가려고 일어났지?” 같은 혼자 해도 되는 생각이나 “저녁 뭐 먹나?” 같은 아무 말을 주로 나눕니다. 친구도 요즘 낮엔 덥지만 밤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잔다고 하네요. 8월 말 늦여름에 너무 당연한 얘기는 걸 알지만, 우리가 주고받은 건 정보가 아니라 공감이라고 하겠습니다.


상쾌한 걸음으로 신천변을 잠시 걷다가 근처 동네에 있는 카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이죠. 분명히 걸어오는 동안 덥지 않았고 숨이 차지도 않았는데 카페 안에 들어서자마자 후끈하게 열이 오릅니다. 몸을 데우는 스위치라도 켠 것 같다고 할까요. 카페의 문에서부터 카운터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얼굴과 목의 모든 땀구멍으로 땀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보송보송한데 나만 더운 몰골이라 당황해서 메뉴판을 보는데 눈에 잘 안 들어오고 잠시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끄는 동안 에어컨 바람에 땀이 식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얼음이 든 커피와 제일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주문했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먹고 갈 거예요.”를 세 번 정도 얘기한 것 같네요. 직원이 다 듣고 마무리합니다. “네, 어머님.”


어머니일 나이죠. 내 또래라면 으레 자식이 있고 그러니까 어머니이고 그래서 이 정도의 나이면 어머니일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지만 “어머님”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나의 개인사를 밝히면서 바로잡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저 빨리 열이 식길 바랄 뿐. 주문을 마치고 출입문 근처 창가의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았습니다. “어휴.” 소리를 내면서. 그리고는 곧바로 친구에게 얘기했. 카페 직원이 나한테 어머님이라고 했다고. 약간은 무용담 하는 기분이었는데 막상 자식이 있어서 진짜로 어머니인 그 친구는 “요즘 누가 그런 호칭을 쓰냐.”면서 분개하네요. 나는 정말 기분 나쁘지 않다고, 아무래도 그 직원이 보기에 붉어진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 횡설수설 주문하는 내가 “갱년기 어머님”처럼 보였을 것 같다면서 친구를 진정시켰습니다. 친구는 “갱년기”라는 말에 바로 수긍하는군요. 친구도 요즘 같은 증상을 겪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어둠이 완전히 내려 있습니다. 도심하천인  신천변에는 밤이 되니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이제 더워서 달리기를 못 한다는 핑계는 못 대겠구나 싶고, 그렇지만 집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오지는 않겠다고 결론을 냅니다. 오늘은 산책만이라고. 잠시 서서 수성교에 설치된 야간조명 덕분에 예뻐 보이는 야경 사진을 찍고,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갑니다. 안 그래도 노안 때문에 핸드폰 화면이 잘 안 보이는데 밤에는 더 안 보이고, 숨까지 참아가며 셔터를 누르는데도 자꾸 흔들려서 사진이 제대로 찍힌 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에 가서 확인해 봐야죠.


걸어가면서 머릿속으로 집에 가서 할 일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우선 나오기 전에 하고 있던 강의 자료 만드는 일을 마저 해야지. 아까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그거였지. 그다음엔……. 생각이 영 정리가 안 되네요. 기분전환이 충분히 된 것 같은데 머릿속은 맑아지지 않은 느낌이고요. 그냥 생각 없이 걸으면서 음악을 듣기로 합니다. 가방 속에 손을 넣으니 익숙한 질감의 주머니가 익숙한 크기로 손에 잡힙니다. 안 봐도 알지. 주머니를 꺼내 입구를 열고 안에 든 안경을 꺼내 접힌 다리를 펴고 얼굴에 가져가다가 이게 뭐지, 싶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돋보기를 왜 쓰려고? 묻고 싶은데 네가 꺼내놓고 왜 나한테 묻느냐고 내가 그럴 것 같습니다. 아차, 음악을 들으려고 했었지. 돋보기가 들어 있던 익숙한 그 주머니를 만들어준 그 친구에게 또 말합니다. “미쳤나 봐. 음악 듣겠다고 안경 꺼내 쓰고 있었다.” 친구는 웃더니 “맥주 마셔서 졸리다.”라고 합니다. 동문서답이 아니고 친구는 지금 못 마시는 술 마셔서 졸린 상태인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잠시 맥주 캔의 적당한 크기에 대해 의견을 나눕니다.


아, 맞다. 음악. 이어폰을 찾아 음악을 듣습니다. Alanis Morissette의 "Ironic"으로 시작. 거의 30년 전에 즐겨 듣던 노래입니다. 요즘의 음악은 통 귀에 들어오질 않아서 옛날에 좋아하던 음악들을 기억해 내서 듣고 있죠. 다음 곡은 Skid Row의 "18 And Life" 네요. 더 오래됐고 역시 명곡입니다. 그런데 어째 Alanis Morissette 도 Skid Row 도 아기자기하게 느껴지는군요. 예전엔 무척이나 쎈 언니, 오빠들이었는데 말이죠.



작가의 이전글 봄, 민들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