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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월 Sep 03. 2023

프롤로그

[ 어중간한 소설 ] S#1. 2021년 5월 오늘

일방통행의 1차선 차도에 가끔씩 차가 천천히 지나간다. 그 양측에는 차도와 구분된 충분한 폭의 보도가 있고 3층 내외의 작고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 오랫동안 갤러리를 비롯한 미술 관련 업종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 둘 카페로 식당으로, 젊은 사람들이 찾는 가게로 바뀌더니 언제부턴가 ‘카페거리’라고 불린다. 전체 길이는 800m 정도로 한 번에 걷기 힘들지 않고 직선이 아니라 “S"자 형태로 살짝 굽어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갈 만큼 특별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도시구조가 만들어내는 정취가 느껴져서 소박하게 예쁘다. 거기에 부주의하게 걸어도 서로 충돌하지 않을 정도로 많지도 적지도 않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활기를 더하고 있다. 거리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봄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며 느리게 걷는 사람들은 통행인이 아니라 상춘객이다.  


그리고 오늘, 가장 좋은 계절 봄 중에서도 가장 봄기운이 무르익은 5월의 한가운데에, 길 양쪽에 늘어선 커다란 이팝나무들과 함께 이곳의 풍경은 절정에 이르렀다. 나무마다 새하얀 꽃 뭉치들이 그득한 게 꼭 쑥버무리 같고 어찌나 예쁜지!        





나도 내가 이렇게 살게 될 줄 몰랐다. 출근시간대를 훌쩍 넘긴 시각에 화창한 날씨를 보고 느끼며 예쁜 풍경의 거리를 걸어서 나만의 작업공간으로 가는 중이라니! 그게 뭐 대수냐고, 뭐가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다. 대단하긴커녕 특별한 것도 없지 않으냐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내가 지금 행복을 느끼는 건 지금의 삶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싫은 걸 하지 않아도 되어서인데, 싫은 걸 안 하는 건 대단히 잘 사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까. 싫은 게 아무리 별거 아니더라도, 먹고살려면 다 해야 하는 일이더라도 전혀 괜찮아지지 않으며, 싫은 걸 매일 한다고 해서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 사람 많은 전철과 버스를 타는 것, 공중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피할 수 없으니 “싫지만 참아야지”라고, 나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은 다짐을 매일 수없이 반복했었지. 결국은 이렇게 백수가 되어 싫은 것들을 피해 살고 있으니, 주문이 이루어진 건가.


적당히 미지근한 공기가 담요처럼 몸을 감싸는 느낌이 좋다. 점심때가 가까워서 그런지 유난히 청명한 날씨 때문인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꽤 있고 풍경이 선명해서 더 활기 있어 보인다. 하늘에서 길바닥까지 곧장 떨어진 햇살은 곱게 부서져서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가로수를 통과해 길가 쇼윈도와 입간판에 닿은 햇살은 흐리지만 일렁이는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채도 높은 파란색의 하늘 바탕에 초록색 이파리와 하얀 꽃들이 흩뿌려져 있는 사이로 해가 숨었다가 얼굴을 내밀었다가 한다. 바람에 이팝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거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옷이 가끔 살랑거리는 데 비해 저 위에 있는 나뭇가지들의 움직임은 쉬지 않는다. 눈이 부신 걸 참고 한참을 바라보니 하늘이 바다 같고 윤슬 위에 이팝나무의 꽃과 이파리들이 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예쁜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네. 사진을 찍으려다가 카메라가 지금 이 하늘을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담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만다. 좋은 계절의 좋은 날씨는, 비록 그 실체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햇볕과 바람뿐일지라도, 사람의 정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자외선 걱정 따위는 진작 개한테나 줘 버렸고, 사람들 오가는 길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데도 부끄럽지 않구나.


어차피 시간을 지켜야 할 일과도 없으니 산책을 좀 더 해야겠다. 지금 서 있는 길, 블록의 중심부를 남북 방향으로 관통하는 중심가로를 따라 걷는다. 원래는 양방향 2차선의 도로였는데 차도를 일방통행 1차선으로 줄이고 양측에 넓은 인도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이팝나무가 늘어서 있지만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보행공간이 충분하고 이따금 포켓파크가 있어서 앉아 쉴 수도 있다. 도로 다이어트 성공.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는 살짝 웃음이 났다. 미술거리라는 이름이 그냥 있는 게 아닌 만큼 거리 곳곳에 가로시설물 급부터 미술관에 놓일만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으며, 최근에 얻은 카페거리라는 별명에 맞게 가로변에 늘어선 가게들이 입면을 예쁘게 꾸미고 야외에 테이블을 놓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길의 끝까지 걸어갔다가 유턴해서 건너편 보도를 따라 중간까지 되돌아온다. 길 건너편에서 해를 등지고 걸으며 보는 풍경이 사뭇 다르고 역시 좋다.  


중심가로의 이면부, 차도와 보도가 구분되지 않은 조용한 골목길로 들어선다. 안쪽에 시에서 운영하는 작은 미술관이 있다. 공공시설이니 설계 공모를 했을 텐데 그다지 인상적인 건축물은 아니다. 미술관이 아니라 공공청사나 도서관, 심지어 은행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고 전국 어느 도시에나 이렇게 생긴 공공건축물이 몇 개씩 있을 법하다. 다만 그 앞의 공지는 야간조명을 겸한 예쁜 조형물과 벤치가 있는 휴식 공간이며 중심가로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이팝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분위기가 좋다. 여름밤엔 동네 사람들이 몇 명씩 앉아 있기도 한데 그 외엔 거의 아무도 없다. 좋은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게 왠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지날 때마다 누가 있나 확인하고 아무도 없으면 괜히 벤치에 앉는다. 아직은 "카페거리"의 활기가 블록 내부까지 스며들지 못하고 있지만, 미술관 때문인지 중심가로변보다 훨씬 저렴한 임대료 때문인지 조용한 이 골목에도 카페와 식당이 늘고 있다. 미술관 앞 벤치에 앉 골목길의 맞은편에 늘어선 가게들을 살펴본다. 이 짧은 구간 안에서도 안 예쁜 식당이 예쁜 식당으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카페가 다른 카페로 바뀌었고 쌀가게가 또 다른 카페로 바뀌고 있다. 모두 최근 서너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카페가 다른 카페로 바뀌기 전에는 뭐였더라. 좁은 입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리창도 출입문의 위치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국 생각해 내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다시 걷는다.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관찰하듯 살펴보는데도 새로 생긴 가게가 이전에 무슨 가게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작년쯤부터 변화 속도가 아주 빨라졌기 때문이다.


블록의 더 안쪽으로, 차가 진입할 수 없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옛길이 그대로 남아 구불구불한 길들이 그물망처럼 블록 전체를 연결하고 있으며, 양쪽으로 오래된 집들이 바짝 붙어 늘어서 있다. 대부분이 한옥과 개량 한옥으로 오래되었다기보다는 낡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주거지역이지만 담벼락에 낙서 하나, 길에 쓰레기 하나 없는 걸 보면 주민들이 골목길 환경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집과 골목길의 경계가 얇은 담장뿐이라 집 안에서 나는 생활 소음이 들릴법한데도 무척 조용하다. 혹시라도 집 안에서 내 인기척이 느껴질까 봐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걷는다. 좁은 길이지만 건물이 다들 낮기 때문에 볕이 잘 들어 환하다. 밝고 따뜻한 하늘이 천장처럼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느낌이다. 가끔 길이 조금 넓어진다 싶은 곳에서 4층짜리 다가구주택을 만나면 이렇게 비좁은 곳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당황스럽다. 거대한 손이 다 지어진 4층 다가구주택을 장난감 블록처럼 집어 들고서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가운데 빈틈에 끼워 넣는 걸 상상해 본다. 건물만큼이나 거대한 손의 거대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이웃의 낡고 작은 건물들을 스치다가 결국 온 동네가 흔들리고 무너진다. 장난으로 시작해서 재난으로 끝나네. 그저 상상이지만 죄책감이 들어서 얼른 접는다. 집으로 들어가는 막다른 길은 피하고 주변과 연결되는 통로를 찾아 걷는다. 막힌 것처럼 보여도 막상 가보면 길이 있고 또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차가 다니는 길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꽃가게에 새로 들인 화분이 있는지 보고 카페나 식당에 손님이 얼마나 앉아 있는지 본다. 야외에 예쁜 공간을 만들어 놓은 카페들은 날씨 좋을 때 발 디딜 틈이 없고, 평범한 듯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들은 늘 절반 정도 자리가 차 있으며, 등받이 없는 의자와 낮은 테이블이 있는 카페에는 젊은 사람들만 앉아 있고, 스타벅스처럼 넓고 스타벅스처럼 진중한 분위기의 카페에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손님의 비율이 높다. 날씨가 좋으니 예쁜 야외 공간이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까 싶었는데,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빈자리가 거의 없다. 회사에 다닐 때는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것 같았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보니 평일 낮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네. 회사를 안 다니는 사람들인가, 오늘 하루 월차휴가를 낸 걸까. 학생 같지는 않은데 회사를 안 다니면 뭘 해서 먹고살지? 아, 나는 아직도 회사를 떠나서는 생각을 못 하고 있구나.


이제 슬슬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 아침에 급하게 작업모드로 전환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백수 생활 와중에도 빈속에 커피를 먼저 마시는 습관은 여전하다. 눈 뜨고부터 커피를 마시기까지 보통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데 오늘은 많이 늦어졌네. 얼른 작업실에 가서 커피를 만들어 마셔야겠다. 카페에서 바리스타가 만들어 주는 커피만큼 맛있지는 않겠지만, 예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따뜻한 게이샤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아쉬울 게 없지. 작은 동네인 데다가 중심가로의 중간쯤, 그러니까 전체 블록에서도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작업실이 있어서 금방 건물 앞에 도착한다. 1층에 있는 식당의 매니저가 가게 앞을 살펴보고 있구나. 인사를 해야겠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말을 잘 안 해서 그런지 목소리 볼륨 조절이 섬세하게 되질 않기 때문에 다소 긴장한다. 오늘 처음 소리를 내는 거라서 아직 목이 잠긴 상태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작은 헛기침을 먼저 한 후, 말소리가 마스크와 길의 소음을 뚫고 명확한 상태로 3~4미터의 거리에 있는 그에게 도달하도록 평소보다 발성에 30%쯤 힘을 더 낸다.


그가 이내 고개를 돌려 나에게 인사한다. 마스크를 쓰면 반도 안 보이는 얼굴에서 상냥함이 한껏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하다. 마스크로 가려진 부분까지 활짝 웃고  있다면 얼마나 화사한 얼굴일까.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부터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의 얼굴 전체를 본 적이 없구나. 그 식당이 건물 앞을 깨끗하게 관리해 주는 덕분에 늘 기분 좋게 드나들고 있어서 정말 고마운데, 그런 나의 마음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이라며 사소한 얘기를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그가 나를 사장님이라 부르고 있다. 내가 장사나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생각해 보면 다른 단골 가게들에서도 손님보다 사장님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있지. 이름을 대신하는 호칭이 대리, 과장, 차장에서 사장으로 건너뛰었군. 사장이 아닌데 사장님 소리를 듣는 게 민망하지만 거부감은 안 든다. 아마도 나이 좀 있는 사람한테 직업과 상관없이 존중의 의미로 ‘선생님’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데 그건 실제 직업이 선생님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는 빨리 작업실에 가서 커피를 마셔야겠다.


건물의 출입문은 항상 그렇듯 활짝 열려있다. 햇살이 문 안쪽으로 깊숙이 뻗어있는 걸 보며 들어섰더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의 맨 아래 칸, 햇살의 끝자락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연두색 눈동자의 검은 고양이. 내가 바로 몇 발짝 앞에 서 있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나는 고양이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고양이가 내 존재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서서 지켜본다. 고양이는 길에서 산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다친 데가 보이지 않고 마르지도 않았고 새까만 털은 매끈하고 윤기 있다. 크기나 생김새로 보아 충분히 다 자란 것 같은데 털이 고르고 근육도 탄력 있어 보이니 늙지는 않은 것 같다. 고양이는 햇살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거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더 가까이에 있는 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내 뒤를 본다. 비킬 생각도 비키라고 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지쳐서 쉬고 있는 건지 이 거리의 봄을 만끽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데, 나도 3층에 있는 내 작업실 창가에서 상춘하고 싶구나. 결국 내가 고양이에게 다가가서 그의 햇살을 가린다. 고양이는 그제야 나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눈을 맞추고 잠시 바라보니 왠지 고양이에게 내 의사가 전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슬그머니 고양이 옆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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