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에 친구들과 극장에 찾았다. 왜 나는 어쩌다 가끔 사람들과 영화를 보면 범죄도시만 보게 되는가.
<범죄도시 3>는 웃긴 영화다. 웃다보면 많은 게 용서된다. 극장을 빠져나올 때는 유쾌한 감정이 따라붙는다. 돈 내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 생각은 영화가 끝난 뒤에 하면 된다.
대신 유쾌한 감정이 가라앉으면 차갑게 생각도 해봐야 한다. <범죄도시>는 인간의 본능적인 면역 반응을 건드리는 영화다. 돈을 벌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 넷플릭스가 성장률 하락 극복을 위해 꺼내든 카드는 포르노의 전면 배치였다. 본능을 건드리는 상품이 성공한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으로 이질적인 것을 거부한다. 이질성이 침투하면 신체는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범죄도시> 시리즈에서도 늘 이질적인 것들이 등장한다. 가령 중국, 베트남, 일본에서 유입된 폭력이다. 범죄도시 시리즈에서는 항상 외국에서 유입된 '악'과, 무고한 '피해자로서의 한국'의 구도가 성립한다.
'이질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규정된 외국인은 청소해야 할 '병균'이 된다. 이제 그들을 죄책감 없이 때려도 된다.철학에서는 이런 존재를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다. 우리가 없애도 되는 존재. 때리고 죽여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는 존재.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과 범죄도시에서 두들겨 맞는 외국인들, '마녀'와 '종북'들. 이질적이고 위험한 것들.
영화에서 '외국인'으로 상징되는 위협은 바이러스처럼 한국 곳곳에 퍼져있다. 그것은 대림동에 있고, 클럽에 있고, 한국 경찰을 감염시키기도 한다. 애초애 '범죄도시'는 그것은 전제로 하고, 그들을 청소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영화다.
나아가 범죄도시는 국가 폭력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영화다. 그것도 꽤 적극적으로 말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악'은 너무도 잔인해서, 원칙을 지키는 공권력 이상의 폭력이 필요하다.
'범죄'의 혼란이 나타나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는 무질서한 세상에 대한 홉스적인 공포다. 그걸 제압하려면 국가에게도 폭력이 불가피하다.폭력을 승인받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에게는 '악'이 필요하다. 그래서 때로 국가는 '악'을 잡는 대신 만들어냈다. 납치하고 고문해서 말이다.
영혼의 개발도상국
'범죄도시'는 위험한 영화다. '나쁜 놈을 잡기 위해서' 라면, 고문도 할 수 있는 것인가. 고문 당하는 사람보다 고문하는 국가가 더 나쁠 때가 많았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다. 애초에 국가한테는 사람을 때릴 권한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나서라도 그렇다.
한국은 영혼이 성숙하지 못한 채 선진국이 되었다. 열강이 된 우리는, '악의 소굴인 해외를 소탕하는 정의의 사도' 영화를 만들어내고, 그걸 천만명씩 본다.
그런데,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머리를 싸매던 이주민과 대림동 주민들의 입장이 있다. 졸지에 악의 소굴이 되어버린 아시아인들의 입장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k팝 산업의 소비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과한 면역 반응이 증명하는 어떤 후진성은, 이제 먹고사는 문제를 위협할 것이다. '범죄도시2'가 묘사한 베트남을 떠올려보라. 내가 베트남 국민이었다면 상당히 불쾌했을 것이다. 필자가 방문했던 베트남은 젊음과 성장, 역사와 저항의 자부심이 넘치는 땅이지, 그런 범죄의 천국이 아니었다.
디즈니의 <인어공주> 실사 영화에 대한 한국의 반응 역시 이 후진성을 증명한다. <CNN>은 한국과 중국의 <인어공주>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인종차별 문제로 보도했다. 이 유별남은우리가 차마 떨쳐내지 못한 구시대의 증상이다. 한국은 인종차별 국가로 낙인 찍혔다. 우리 안의 후진성이 k-콘텐츠 산업의 이미지까지 위협한다. 영화에 대한 평가와, 여주인공의 외모에 대한 집단 조롱은 다르다. 세계화는 진작 끝난 시대다. 다양성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손가락들의 혐오 발언을 관리하는 것은 이제 먹고사는 문제가 될 것이다.
자신의 언행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고민할 때, 우리는 보다 성숙해진다. 웃긴 영화는 많다. 웃기다는 사실만으로 범죄도시의 미성숙함이 정당화돼서는 안 된다. 한국의 콘텐츠를 세계가 본다. 이제 범죄도시 시리즈는 조금 사려깊어질 때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