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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Aug 05. 2023

K팝과 힙합의 성공 이유 / 뉴진스의 노래가 슬픈 이유

벼농사. 아이돌. 사회학. 힙합

k팝이 성공한 이유. 뉴진스의 노래가 슬픈 이유.


지금은 '온세뉴' 시대


솔직히 너무 어린 게 아닌가 싶었다. 뉴진스가 데뷔했을 때 말이다. '그렇게 어리다고? 그정도면 아동 노동 착취 아니야?' 뉴진스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대학교 후배에게 그렇게 물었다.


억지 밈 같았다. 유튜브와 릴스를 휩쓴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챌린지가 유행할 때 말이다. 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건한 자세로 <Super shy> 뮤비를 김상한 후 뒤늦게 회개했다. 바야흐로 '온세뉴'의 시대. 온 세상이 뉴진스다.


이전에 쓴 <걸그룹의 사회학>에 이어 아이돌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뉴진스의 노래는 왜 항상 슬픈 단조일까. 스산하거나 아련한 색감. 몸부림처럼 보이는 빠른 춤, 아름다운 소녀의 이미지. 이런 구성은 <ditto>부터 <super shy>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뉴진스 뮤비를 계속 보면 무언가 멜랑콜리해진다. 뉴진스의 뮤비는 매끄러운 연출과 색체 탓에 마치 미술 작품을 보는 듯한데, 이것이 바니타스 정물화를 볼 때의 감정 아닌가 한다.

미술에서 흔히 쓰이는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허무'라는 뜻이다.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꽃, 해골, 촛불, 왕관 같은 것들을 그린다. 우리는 모두 늙고 병들기에,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은 언제나 인류의 난제였다. 동양에서도 불교가 삶의 허무를 고민했고,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도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사랑은 시들고 성취는 무너진다. 우주는 무질서도의 법칙에 따라 공허의 상태로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의 삶도 당연히 덧없다. 그래서 찰나의 아름다움이 더 소중하다. 싱그러운 소년이나 소녀의 이미지는 그런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정물화로 치면 꽃과 왕관의 이미지와 비슷한 효과이다. 시간을 돌릴 수는 없기에, 아름다운 소녀(소년)의 이미지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욕망'을 상징하고, 가슴에 모호한 통증을 남긴다.


Vanitas Still Life, Giovanni Francesco Barbieri .


벼농사와 걸그룹, 프랑스 미술


뉴진스부터 에스파, 르세라핌까지. 뮤비에서부터 세계 시장이 타켓임을 드러낸다. 이젠 한국인 멤버보다 외국인 멤버가 많은 K팝 그룹이 특이하지 않다. K팝의 퍼포먼스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절도있는 칼군무가 토대였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있었고, 틱톡 같은 sns는 그것을 운반한 도체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 연예 산업이 이토록 절도있는 군무를 가능케 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이하게도 <쌀 재난 국가>의 저자 서강대 이철승 교수는 그 이유를 벼농사에서 찾는다.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은 몬순 기후라서 벼농사를 짓는다. 벼농사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에 자연스레 동양은 집단 노동 사회가 되었다. 밀농사를 지은 유럽의 경우, 적은 노동력으로도 밀을 생산할 수 있었기에 가족 단위의 개인주의 사회가 만들어졌다. 다만 밀은 단백질이 없는 불완전 식품이라서 고기와 함께 먹어야 했다. 그래서 누구는 소를 키우고, 누구는 밀농사를 지었다. 덕분에 유럽은 시장 거래가 발달한 분업화 사회가 되었다.

반면 동양 사회는 집단 노동으로 작동했고, 누구 하나가 일을 게으르게 하면 다같이 굶어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동양인은 '무임승차'에 예민했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개성을 중시하기보다는 집단적인 목표를 이루는 기계처럼 살아가게 됐다. 이 문화적 DNA가 이어져 한국인은 서로를 감시하는 '성실한 민족'이 되었고, 유럽인들이 감히 흉내내지 못하는 칼군무를 만들어냈다. 비록 당신이 조금 불행하대도 말이다.



집단 노동이 만든 상호 감시 구조에 '과거제'라는 출세 하이패스 경쟁 시스템이 더해지며 동양은 비교와 질시의 사회가 되었다. 이 비교와 질시, 경쟁을 토대로 동아시아는 엄청난 경제적 성취를 이뤄내기도 했다.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 단기간에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낸 것이다.

한국의 'k팝 아이돌 전사' 양성 시스템 역시 한국의 교육과 체육이 그렇듯 집중 학습을 통해 이뤄진다. 백인들은 이 가혹한 시스템에 비판적이지만, 그들 또한 이랬던 시절이 있었다.

프랑스는 과거 '문화 전사 양성 학교'와 '경쟁 시스템'을 통해 미술 발전을 이뤘다. 르네상스 당시 미술의 중심은 이탈리아였고, 프랑스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미술 아카데미'를 세워 체계적으로 미술인을 양성했다. 서구의 경제가 그렇듯 미술 역시 자유 방임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프랑스는 여기에 더해 '살롱'이라는 경쟁 체제를 도입했고, 그 경쟁의 장에서 프랑스 미술은 세계 최고가 된다. 이 살롱 때문에 고흐 같은 당대의 미술인들이 아주 불행했대도 말이다.


전에 쓴 글인 <걸그룹의 사회학>과 함께 읽어보세요!


이런 k팝이 힙합과 비교하여 어떻게 한국의 시대를 대변하는지까지 쓰고 싶었는데, 인스타그램에는 글자수 제한이 있어서 관뒀다.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내용을 간략히 덧붙여보았다.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


지금의 힙합이 움튼 장소를 브롱스의 빈민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서구의 전통적인 부자들과 달리, 래퍼들이 명품 브랜드와 금붙이를 과시하는 것도 빈민가 소년들의 가난함 때문이었다. 가사의 소재로 흔히 마약이 등장하는 이유도, 힙합이 흑인 문화와 결합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힙합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예술이었다.




애국심이란 수면제가 책임감을 재우니
반역심의 긴 수면이 독재를 깨우니
배불리 쳐먹는 자들이 자유경제 삼켜
불경기라는 극꾸며 경쟁심을 깎어
내가 왜 내 땀의 열매를 타인에게 바쳐
어째 내 꿈을 조립 라인에게 맡겨
blind 교과서 사상의 학대 보수주의가 강요하는 상상의 낙태


(Lesson 2, 에픽하이)



한국에서도 처음 대중과 만나던 시절의 힙합은 저항의 외침이었다. 2004년 발매된 에픽하이 <Lesson 2 (sunset)>의 가사는 어떻게 국정원에 안 잡혀갔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마찬가지로 2004년에 발매된 래퍼 '피타입'의 노래 <돈키호테>는 김남주 시인의 죽창가를 연상시킨다. 시인은 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이상을 발견하고, 찌르르 전율한다. 자신에게 그 아름다움을 닮은 예술을 구현할 능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나에게 더불어 꽃이 되자고,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고, 죽창이 되어 세상에 내리자고' 말하는 자연의 외침을 들었던 김남주 시인처럼, 돈키호테는 언젠가 그의 노래가 눈물되어 세상 위에 흐르리라 믿었다.




"나는 아직 초라한 나그네
오늘도 꿈을 꾸네
이뤄질 꿈인지도 장담할 수 없다만(..)

내가 잠든 무덤가에 마이크 하나만 던져다오
파란 풀잎과 바람에 몸을 떠는 갸냘픈 들꽃 하나
저 모두가 나 대신 내가 부르다만
내 노래를 이어 부르리라

가슴에 품은 희망과 꿈은
이 날 머금은 이 많은 서러움 만큼이리라
이제 세상 위에 눈물되어 흐르리라
난 노래 부르리라(..)

내가 바라는 건 정체된 이 문화가
거센 바람을 걷으며 앞으로 나가 빛을 발하는 것
내가 말하는 걸 기억한 어린 아이들이 어서 자라는 것"


(돈키호테, 피타입)


돈키호테, 피타입



우리 힙합은 배고픈 저항 문화 시기와 과도기를 잘 건너왔는가. 돈키호테가 꿈꾼 전복의 미래는 오지 않았다. 생활은 언제나 인간의 죄악이다. 예술도 자본주의의 맥락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힙합에서도 장르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다. 힙합을 이용한 장사치들은 돈과 명예를 차지했고 예술가는 여전히 으슥한 곳으로 밀려난다. 사업이 된 힙합은 저항을 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맞서는 대신, 못된 어른을 흉내내기에 바쁘다.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라고 외치던 정신은 사라지껍데기잔뜩 남았다.


<쇼미더머니>에 잠깐 출연한 가수 이찬혁이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고 무심히 던진 한 마디에 온갖 래퍼들이 옹졸하게 한 마디 씩 얹었던 것을 기억한다. 폐부를 찔린 것이다. 사랑 타령 뿐인 음악이라면, 다른 장르와 다를 것이 없다. 물질 자랑이 전부인 장르라면, 그 물질이 사라지그들은 다시 초라해질 것이다. 그래서 tv쇼가 된 힙합은 이제 멋이 없다.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고고한 정신이 사라진 가사는 중산층 소년의 투정 같다.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은 경쟁과 물질의 폭정은 노래부터 장악했고, 노래는 다시 우리의 내면에 괴물을 키운다. 강퍅한 개인들만 남은 세상의 껍데기 속은 썩어간다. 하지만 '어느 새부터 힙합은 멋이 없다'는 자성, 돈보다 사랑, 트로피보다 철학이,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더 소중하다는 성찰이 시작될 때, 한 시대는 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죽창가, 김남주)




아무튼 이 글은 군입대 후 뉴진스의 뮤비를 반복 시청 당하며 쓰게 된 글이다. 조금 비판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 관물함에도 뉴진스 사진이 붙어있다. <cool with you> 뮤비에 나오는 양조위는 왜 이렇게 멋있게 늙는지 모르겠다. 화양연화 때보다 멋있다. 그런데 양조위가 왜 나오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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