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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Aug 06. 2023

한심한 시대를 예술로 이겨내는 법

사걀과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무례한 시대에 예술로 저항하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예술론이 있다. 진은영 시인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 그는 사랑과 하나인 것이 치유, 저항, 예술이라고 썼다. 중세봉건 사회부터 자본주의 시대까지. 사회는 우리 존재규정한다. 주체성이 소각된 서로를 오롯이 바라보게 하는 사랑은, 세계로부터 상처받은 서로를 치유한다. 상처 입힌 세계에 저항할 동력이 된다.

그렇게 사랑으로 저항하며 치유하는 행위가 곧 예술이다. 그래서 "사랑과 저항이 하나이듯, 사랑과 치유, 예술도 하나다".


인스타그램 @garbageidea_ ('매일한편')


그런 예술론에 적합한 화가가 샤갈이다. 샤갈은 러시아제국 시절 유대인 격리 지역에서 태어난 화가다. 유대인들은 험한 일을 맡아 했다. 그들의 노동이 없었다면 러시아의 일상은 토대부터 무너졌겠지만, 러시아인은 유대인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상습적인 폭행, 강간, 살인이 반복됐다.

예민한 감수성의 어린 샤갈은 아버지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거부감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모든 아들의 지상 과제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다. 샤갈은 아버지의 굳은 손와 자신의 고운 손을 차례로 바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생선통을 옮기며 살 수 없다. 어딘가 영혼과 이성을 저버리지 않는 삶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꿈을 꾸지 않았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 꿈을 꾸는 자는 곧 예술가이고, 꿈을 꾸는 자는 최악의 시대에도 최고의 시절을 피워낸다.

샤살은 러시아 미술의 중심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친다. 당시 유대인은 통행증 없이 이동할 수 없었지만, 우연히 유대인 변호사를 만나 그의 비서로 채용된다. 덕분에 통행증을 얻은 샤갈은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체계적으로 미술을 배운다. 그를 채용한 변호사 또한 미술 애호가였기에 화가를 꿈꾸는 유대인 소년을 아꼈다.

천대였던 샤갈은 지루한 고전 미술에 권태를 느꼈고, 그 무렵 파리의 개혁적인 미술 사조를 접한다. 당장 이해할 수 없어도 혁명적 에너지의 분출 품고있는 가능성은 혁명가들을 불러 모은다. 샤갈 역시 변화에 가슴이 뛰었으리라. 샤갈은 다시 파리로 떠난다. 생선 하나를 사서 며칠 동안 먹으며 생활한다. 그는 스승을 두거나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파리의 모든 골목이 그의 미술 학교였기 때문이다.

샤갈은 다른 화가들이 평생을 바쳐 얻는 걸작을 유학 1년만에 완성해낸다. 그 작품이 <나와 마을>이다. 고향을 떠나 페테르부르크로, 파리로 떠났지만. 결국 완성한 걸작은 자신의 고향 마을 풍경이었다.


나와 마을


멀리 떠나도 떠날 수 없는 뿌리 같은 것이 있다. 해외에 체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내가 얼마나 한국을 싫어했는데. 연약한 아기를 더불어 보호하고 양육해온 공동체의 기반은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샤갈은 소년 시절 혐오했을 고향 마을을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동화 같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하늘에 떠있는 그림 <생일> 속 공중부양은 유대인 설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2천 년 전 영토를 구실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땅을 경작하고 역사를 이어온 팔레스타인 민중의 예정된 복수로 유대인 시민들이 다시 고통받고 있다. 다만 샤갈의 시대는 유럽의 유대인 차별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민족주의, 차별과 혐오, 국가주의, 온갖 낡고 악한 것들의 결과가 특정 민족에 대한 학살이다. 누가 주체가 된대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인종을 구실로 한 폭력행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


모순과 갈등이 극에 달한 샤갈의 시대에는 기어코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발발한다. 샤갈은 나치의 잔혹한 유대인 학살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저항을 택했다.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다. 샤갈은 말살당하는 유대인의 전통 신화를 그림으로 그린다. 사라지는 민족을 보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 뿐이었다. 기억은 서로 다른 개인을 하나로 이어준다. 이야기가 곧 기억이고 정체성이다. 샤갈은 폭력과 파시즘, 전쟁의 시대에 이야기와 예술로 저항했다.





한국에도 정당성이 있다면


정지아 소설가의 역작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그런 작품이다. 뿌리를 긍정하고, 폭력으로 지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대에 저항하며 아픔을 치유한다.

대한민국은 전국의 땅굴에서 사람들을 '청소'하고, 제주도와 지리산의 저항을 진압하며 세워진 나라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학살을 자행한 이승만과 미군정에 있지 않다. 그들로 상징되는 무능과 부패, 가난, 폭력, 야만에 맞선 사람들 덕분에 대한민국에도 정통성이란 게 있다. 이름없는 그들이 수없이 죽어가며 악몽과 싸웠고, 끝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기에 한국 현대사는 조금 자랑스러워진다.

세상이 더 나아지기까지, 마산과 광주 등에서 잦은 희생이 있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식한테 좋은 걸 먹이고 입혀보겠다고 아둥바둥 대학을 보낸 사람들이 있었고, 대학을 나와서도 독일로 떠나 탄광일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에게 농사 지을 땅 한 줌 있는 세상을 물려줘보겠다고 총을 든 농부들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그래서 빨치산을 긍정하는 일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다. 정지아는 그 작업을 시트콤 같은 저돌성으로 풀어낸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건조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촉촉한 이야기를 놀라운 필력으로 잇는다. 이야기를 따라가려 애써야 하는 첫 두장에서부터 웃음이 터지는 소설은 흔치 않다. 걸신 들린듯이 읽다보면 어느샌가 웃고있고, 웃다보면 어느샌가 눈물이 난다.


주인공은 아둔할 정도인 아버지의 이타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작가는 알고있다. 아버지의 선량함과 다정함이 곧 저항이고 사랑이며, 이 땅의 역사이고 위대함임을. 이기적인 지배세력의 낯을 뜨겁게 하는 위대한 역사를 방치하고, 심지어는 매장하고자 하는 지금이다. 박정희가 건국 훈장을 수여한 홍범도 장군을 육사에서 치우겠다는 반이성주의의 시대다. 나라와 이념의 바깥에서, 단지 나라를 되찾고자 생을 바친 독립운동사에 한국의 정당성이 있다. 그 헌신의 정당성을 뿌리 뽑고 그 자리에 비굴한 친일 극우주의를 심어질 것이다.


자유 대한민국 육군은 '소련 군복'을 입은 홍범도 흉상에 경례하는 것이 불쾌하단다. 참 불쾌할 일도 많다. '자유의 편'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는 자한테는 경례를 할 수 없는 자유의 나라. 혹시 좌파가 선거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군은 투표로 선출된 권력이라도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경례하지 않을 것인가.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어리석음이다. 지역 갈등이라고 하지만 사실 호남 차별이다. 지배세력이 숨긴 당당한 저항의 역사는 빨치산에서 5.18로 이어진다. 여전히 그 역사는 차별의 대상이다. 우리 시대는 DJ 이전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런 무례한 시대에, 그 저항의 역사는 차별의 대상이 아닌 복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이야기를 조우하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화자의 아버지가 품은 인내와 너그러움의 이야기에는 슬프도록 감동적인 열정이 있다. 화자가 회피해온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삶이 장례식에서 조립되는 이야기에는 내가 몰랐던 부모의 삶이라는 매혹이 있다. 인간을 사랑한 아버지의 삶에는 하염없이 살 뿐인 인생의 해답이 있다. 삶과 세상이 잔혹하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 다정해져야 한다. '사람잉게 그렇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면, 아버지의 이 문장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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