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쁨 Mar 31. 2022

내 꿈은 아이돌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 3

중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나는 아이돌이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2008년, 아이돌의 시대라고 할 수 있던 그 시대를 살며 나는 아이돌이 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애초에 내게 무명 아이돌이 될 수도 있다는 고민은 없었다. 나는 반드시 유명 아이돌이 될 거고, 집안을 일으키리라. 이건 일종의 내 사명이었다.


친구들 중 일부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때문에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들 중에는 부잣집 아들도 있었지만 가난한 집 아들도 있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 스토리를 들으며 우리 집을 살릴 방법은 이것뿐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우습게도 내겐 약간의 재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고, 춤도 따라 출 정도는 됐다. 가장 무섭다는 애매한 재능을 가진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내 가수가 연습생이던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현실은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다. 집에서 조금 연습하고 오디션을 보러 다닌 걸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학원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나는 정보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던 건 정말 어쩌다가 한 번 1차 오디션에 합격할 때 느끼는 가능성 있는 상태라는 기분 때문이었다. 아예 가망이 없었으면 포기했을 텐데.


물론 내가 항상 꽃밭처럼 즐겁게 꿈을 꾸었던 건 아니다. 나의 사명에 한껏 취해 있었지만, 동시에 항상 불안했다. 10대가 흔히 겪는 스트레스와는 조금 달랐다. 내겐 정말 책임이 있었다. 그 불안은 부부 싸움이 있는 날이면 더 심해졌고 나를 갉아먹었다.





고등학교 초반엔 대학을 생각지도 않았다.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아이돌만 되면 대학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불안감이 밀려왔다. 선생님은 나도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얘기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괜히 시험기간이 책상에 붙어있게 됐다. 그 학기 내신이 2등급까지 올랐다. 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었고, 내가 유리한 과목들로 잘 준비하면 충분히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예체능반에 들어갔다.


우리 학교는 문과, 이과 외에 미술반, 예체능반이 나뉘어 있었다. 미술반은 2학년부터, 예체능반은 3학년부터 나뉘었다. 예체능반에는 음악, 실용음악, 체육처럼 다양한 분야의 예체능 계열 대학 진학을 원하는 아이들이 모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학교에서 전공 시간을 제공하고 약간의 코칭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줬지만 사실상 클래식 피아노와 체육 전공을 제외한 다른 전공자들은 할 게 없어 자유 연습시간을 가졌다.


엄마는 교회의 인맥을 동원해서 가장 싸게 레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결국 실용음악과 학생을 찾았고, 레슨을 받게 됐다. 레슨은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진행됐고, 나는 공짜 연습실을 구하기 위해 또 한참을 돌아다녔다. 문화의 집에 동아리 등록해가며 겨우 연습실을 구했고 그때까진 힘들긴 해도 배우는 즐거움은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안 가 아빠가 일을 그만뒀다.


실용음악과 입시를 포기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아빠의 실직으로 인한 금전적인 문제도, 선생님들의 설득도 있었다. 고민은 있었지만 결단할 수 있었던 건, 아이돌은 꼭 실용음악과에 가지 않아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미련은 버리지 못해서 마지막 수시 2차 때, 한 학교의 실용음악과를 넣었다. 연습이라고는 노래방 몇 번 가서 한 게 다 인데도 예비 초반을 받았다. 그렇다. 애매한 재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나는 일반 대학을 갔지만 결코 아이돌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돌만이 이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2014년, 나는 두 번째 대학을 자퇴한 후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했다.


사실 이게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였는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광기였는지는 아직 헷갈린다. 아마도 둘 다였던 것 같다. 어쨌든 내가 학원비를 부담하니 눈치 보지 않고 노래하러 다닐 수 있었다. 실용음악과 입시는 돈 없인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시곡 MR을 제작하는 데만 많은 돈이 들었다. 게다가 실용음악과 입시곡이 하나겠는가? 내 입시곡은 네 곡이었고 그중 세 곡의 MR을 제작해야 했다.


결국 나는 실용음악과에 합격했다. 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얻은 성취였다.


그러나 아이돌과 실용음악과는 다르다. 나는 또 이걸 간과했다. 아이돌은 신흥 귀족이라 불리지만, 음악가는 가난하다. 가난에 벗어나고 싶어 음악을 시작했는데 다시 가난해질 순 없었다. 게다가 1학기 말이 되자 취업률이 떨어지는 실용음악과를 폐과 하게 됐다는 공지가 내려왔다. 나는 자퇴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아이돌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오디션으로 아이돌을 많이 배출한 학원 상담을 다녔고 그중 한 곳을 등록했다. 그래. 애초에 나는 이런 학원에 다녀야 했던 거다. 아이돌을 양성하는 그런 학원. 이걸 22살이 되어서야 알다니. 애석하게도 내가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학원을 등록할 때 내가 들었던 말은 “나이가 있으니 올해나 내년이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해라.”였다.


그래. 누굴 탓하겠나. 결국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학원을 그만뒀다. 그렇게 나는 꿈마저 잃었다.


나는 한동안 여자 아이돌의 음악을 즐기지 못했다. 유행하던 오디션 프로그램도 아예 보지 않았다. 질투와 좌절로 점철된 나는 노래와 춤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쯤 깨달았던 것 같다. 아이돌이라는 꿈은 사명과도 같았지만, 동시에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하고 싶어 했던 유일한 일이었다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우리 집 사정을 어디까지 알아야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