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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Mar 05. 2024

201호 소설가

그는 산토리니로 갔을까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 엽서 한 장.

술잔 없이 술을 마셨다. 자목련이 피고 왕벚꽃잎이 함박눈처럼 벤치에 쌓여도 그대는 언제나 연락 두절이었다. 나는 또 참지 못하고 외출을 한다.


화실을 나와 신호등이 황색으로 점멸하는 새벽까지 골목길을 떠돌다 지치면, 방마다 장미 무늬 벽지가 도배돼 있는 목련 여인숙으로 간다.


만 원짜리 끈적이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대상 없이 퍼부었던 온갖 저주는 벽 속에 갇혀있다. 바람 부는 벽 속에선 팬 플롯의 서늘한 선율이 고립된 청춘을 위로하지만 끝내 외롭다는 말 한마디는 참지

못했다. 목련 여인숙에서는 서러움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소리 내어 울어도 흉볼 사람이 없다.

가끔은 옆방에서 나 대신 울어주는 이들도 있는데 우는 이유는 몰라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삼류들끼리 


목련 여인숙 이층 끝방 201호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소설가. 여인숙이 글쓰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 하나보다. 목련꽃 하나 없는 목련여인숙의 청승맞은 분위기중편소설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보름에 한번 마누라인 듯 보이는 여자가 옷가지와 몇 푼의 돈을 놓고 가는 것을 여인숙에 상주해 있는 늙은 천사가 목격했다고 한다.


오늘 새벽엔 늙은 천사를 가운데 두고 201호와 술을 마셨다. 201호는 침을 튀기며 백석의 시를 찬양했고, 늙은 천사는 자기도 젊었을 땐 잘 나갔다 했으며, 나는 렘브란트의 빛과 그림자를 말하려다 비어있는 201호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

201호가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나는 항상 청산가리를 몸에 지니고 있지, 무엇보다 든든한 보험이야. 자유를 찾는 날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여행이나 떠날까 해. 그곳이 산토리니 같았으면..."

"주인 언니가 들으면 당장 방 비우라 하겠네, 세상이 뭐 감옥이라도 되나요? 죽더라도 우리 여인숙에선 안 돼요."

늙은 천사가 눈을 흘기며 이불을 끌어다 무릎을 덮는다.


201호 벽에는 산토리니의 커다란 사진이 붙어있는데 절벽 위의 하얀 집마다 작은 문패를 달아 놓았다. 명철이네 집, 영숙이네 집, 부겐 베리아 피어있는 엄마네 집...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집 한 채씩 선물했다고 한다.

마지막 집에 나와  늙은 천사의 이름도 있다.


201호가 본격적으로 술주정을 한다.

"꽃 피면 웃고 꽃 지면 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내가 그대에게 꽃값(花代)을 지불하고 하룻밤 잤으니 그대도 봄꽃입니다."

늙은 천사를 보며 천진스럽게 말한다.

"오늘은 소설가에, 화가에 아주 꼴같잖은 예술가들 속에 파묻혀 정신이 없네, 지금부터 내가 술 살 테니 해 뜰 때까지 마셔봅시다."

주름진 눈웃음에 홀짝 소주를 삼킨다.

진달래 빛 립스틱이 술잔에 묻어났다.


쓰레기차가 널브러진 밤의 기억을 정화하는 새벽까지 우리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무채색의 하루가 뒤척이고 지하철의 첫차가 숨을 참으며 달리고 있었다.



자유로운 날


옥상 화단의 해바라기 대궁이 굵어질 무렵,
존재를 잃어버렸던 삐삐가 오랜만에 몸을 떨었다.
목련 여인숙 201호 소설가의 행방불명. 두 달째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자유를 찾는 날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여행을 가겠다고 했는데 그날이 왔을까. 사라진 그날은 출판사와 계약하는 날이었고 아내와 이혼에 합의한 날이라고 한다.

201호 아내였던 여자가 행방을 묻는다.

그는 자유인으로 산토리니에 있다고 내가 말했다.
아내였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 무시한다.


태양이 정수리에 멈춘 정오에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평상에 누웠다.

초여름 하늘 멀리 비행기 하나가 마침표지워질 때까지 시린 눈을 떼지 않았다.


순백으로 표백되는 산토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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