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이 간절한 어느 직장인의 강릉 호텔 3박 4일 생활기
지쳤다. 몹시. 몸도 마음도. 한 때는 즐거워하며 동기 부여하던 일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누군가 악의 없이 하는 말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역치가 낮아졌다. 낮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했다. 이것도 다 지나가려니 하기에는 증상이 길어졌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았다.
노련한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무료함이나 에너지 소진을 극복할 자신만의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들으며 정처 없이 빠른 걸음을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리프레쉬되는 효과가 있어 이 방법들을 자주 이용한다. 이번에도 에너지 소진을 극복하기 위해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 즐겁게 흥에 올라 실없는 대화도 나누고 근황도, 고민도 나누다 보면 어느덧 기분도 나아지고 에너지가 생기게 마련.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한동안 안 사던 귀여운 디자인의 플랫도 사봤지만 그대로다. 이번에는 에너지 소진의 골이 깊음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짐을 꾸렸다. 목적지는 강릉이고 목적은 휴식. 최대한 짐도 일정도 심플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3박 4일임에도 짐은 라코스테 쇼퍼백 하나로 끝났다. 바쁜 시기이지만 과감히 연차도 썼다. 가기 전까지 너무 바빠서 여행 일정도 제대로 짤 수 없었지만, 목적은 힐링이니까. 누워서도 바다가 보이는 호텔만 믿고 움직이기로 했다.
강릉행 KTX 기차에 탑승하고 나서야 여행 일정을 계획할 시간이 생겼다. 강릉 여행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온갖 맛집과 관광지를 섭렵하는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휴식과 기분 전환이 목적이므로 그에 충실한 계획만을 세우기로 했다. 3가지 기본 원칙을 세우고 3박 4일 내내 이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푹 자고 오랜 시간 뒹굴거리기
맛있는 커피/술을 마시기
아름답고 영감이 되는 모습만을 눈에 담기
도착해서 체크인을 한 후 호텔 근처의 와인바에 갔다.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손님은 나뿐이었다. 포트와인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포트와인이 메인인 듯 하기에 주문하여 짜계치와 함께 마셔보았다. 기차 안에서 보던 넷플릭스 드라마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을 마저 보며 식사를 마쳤다. 시장함이 해결되니 얼른 호텔에 들어가 씻고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호텔로 돌아와서 씻고 바로 푹 잠들었다. 적당히 포근한 베개와 매트리스, 헤드 조명 덕에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자기 전 틀어두는 음악 리스트의 첫 곡이 끝나기도 전에 잠들었다. 요 며칠 새벽에 계속 깨곤 했는데 한 순간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잤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안목해변을 바라보았다. 서둘러 일어나지 않고 누워서 바다를 멍하니 감상했다. 음악도 듣고, 보던 넷플릭스 드라마도 틈틈이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계속 쉬다 보니 슬슬 움직이고 싶어졌다. 오기 전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은 전시에 가보기로 했다. 근처에는 마침 좋아하는 테라로사 경포호수점이 있어 간단히 커피와 빵을 먹기에도 좋은 위치였다.
미디어아트 전시를 원래도 좋아하지만, 이 전시는 더욱 특별했다. 모든 공간이 매력적이었다. 천둥이 치는 공간, 폭포수가 내리는 공간, 아름다운 꽃의 공간... 가장 오랜 시간 머문 공간은 해변을 형상화한 공간이었다. 다른 공간들의 경우 이리저리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피해(?) 다녔다면,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해변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주는 느낌이었다. 벽도 바닥도 모두 완벽하게 해변을 형상화한 공간.
전시를 보고 커피도 마시고 순두부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버드나무 브루어리 수제 맥주를 잔뜩 든 채로. 냉장고에 맥주를 채워두고 보던 드라마를 마저 보기 시작했다. 잠이 오면 잠을 잤다. 배가 고프면 호텔 지하의 식당, 편의점, 카페에서 먹거리를 사 와서 먹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휴식에 집중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하늘과 바다의 색깔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면 시간이 빨리 흘렀다.
푹 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만 눈에 담고 나니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노트를 펴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했다. 고민하던 것들과 지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적어보고, 지친다 싶으면 노트를 닫고 푹 쉬었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했다. 노트 2장을 내리 적다 보니 더 이상 적을 것이 없었다. 생각하기도 싫어서 덮어둔 것들을 가감 없이 적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많이 풀렸다.
가끔은 나뿐만 아니라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집과 사무실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친구를 만나고, 맛난 것을 먹고, 운동을 하며 나 자신의 에너지를 채우는 노력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내가 주로 머무는 공간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살짝 벗어나 서로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3박 4일간 집과 사무실을 벗어나 재충전하는 시간은 분명히 의미 있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벌어서 또 나 자신에게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게 해주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하고 답답하던 상황들도 거리를 두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곧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나는 또 힘들겠지만, 한동안은 스스로 잘 추스르며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한 달씩 바다 뷰 호텔에서 쉴 수 있는 날도 오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