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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티오브 May 15. 2022

오늘 하루 연차 좀 쓰겠습니다.

사유도 없이 연차 휴가를 통보한 어느 직장인의 속사정


어느 날, 나는 사유도 없이 당일 연차 휴가 사용을 통보했다.

직장인에게 연차 휴가란 마른하늘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다. 하루 8시간, 일주일 40시간을 회사에서 꼬박 보내고 있는데, 유급으로 출근하지 않을 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근로기준법에서는 연차 유급휴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60조(연차 유급휴가) ① 사용자는 1년간 80퍼센트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개정 2012. 2. 1.>
② 사용자는 계속하여 근로한 기간이 1년 미만인 근로자 또는 1년간 80퍼센트 미만 출근한 근로자에게 1개월 개근 시 1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개정 2012. 2. 1.>


회사마다 상황은 다를 테지만, 연차 사용에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다. 적어도 연휴 전이나 월/금요일에 연차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팀 내 사전 공유가 필요하다. 꼭 연휴 전이 아니더라도 당일 급작스럽게 연차를 통보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출근일 오전, 당일 연차 휴가 사용을 통보했다. (그것도 카카오톡으로)


사유는 이러했다.

한동안 기존 업무에 더하여 프로세스 개선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야근이며 주말 출근을 하던 무렵이었다. 눈을 뜨고 주섬 주섬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도저히 출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5분만 더 누워 있어 보자고 생각하며 누워있다 보니 어느덧 8시. 간단히 씻고 바로 출발하면 간신히 지각은 면하겠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팀장님에게 전화를 드리려고 했지만 힘이 쭉 빠졌다. 카카오톡을 켜고 타닥타닥 간결하게 목적만 타이핑했다. 사유를 적을 힘도 없었다.

-팀장님, 금일 연차 사용하고자 합니다. 업무에 차질 없게 하겠습니다.


팀장님의 허가 답장을 받고 다시 잠들었다. 중간중간 깨어나 간간히 오는 업무 전화를 응대했다. 깨었다가 다시 잠들었다가의 반복.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닌 기분이었지만 오후가 되자 컨디션이 좀 나아졌다.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내고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잠시 후 걱정이 밀려왔다. 앗...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오늘 할 일이 많은데.


황급히 업무용 메신저와 그룹웨어를 켰다. 밀린 메신저들 중 급한 안건에 대해서는 바로 답장을 했다. 사무실에 출근한 팀원들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OO님, 오늘 ~ 건 어떻게 되었나요?

-사무실 분위기는 어떤가요? 저한테 급한 전화 온 것은 없나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밀린 업무 요청에 회신하고 나자 팀원 Y의 메신저가 눈에 들어왔다.

-OO님... 연차시잖아요. 쉬세요. 오늘 쉰다고 하늘 안 무너져요.




"우리 모두는 회사의 부품이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다."

동료들과 모이면 늘 위 명제를 읊으면서도, 나 아니면 일이 굴러가지 않을 텐데 하는 모순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곤 한다. 누구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를 한 번쯤은 꿈꾸지만, 결국 우리는 회사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을 굴리는 바퀴와도 같은 존재들이며 다른 바퀴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


나 아니면 회사가, 프로젝트가, 일이 굴러가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할 때는 잠시 물러서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저 사람이 없다면 우리 회사가 굴러갈까' 싶었던 A임원, B팀장, C팀원이 퇴사해도 회사는 잘 굴러간다.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 조금 늦춰진다고, 다른 사람에게 위임된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내 옆자리 팀원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없어도 나의 부재는 금방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동기부여의 요소가 사라질 수도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럴 때는 회사에서의 나의 존재 가치보다는 나 자신의 경험적/역량적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이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특정한 경험치 또는 역량을 쌓았고, 이는 이 회사가 아닌 더 나은 조건의 새로운 시스템에서 적응하거나, 나만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후에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 좋은 컨디션으로 출근하여 업무를 수행했다.  


이제 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를 꿈꾸지 않는다. 좋은 경험치를 많이 쌓아서 더 좋은 조건의 시스템에서 활약하는 나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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