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사는 나에게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고 주변에서 물을 때가 있다.
나는 대화가 되는 여자를 원한다고 선뜻 말한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여러 사람을 상대로 말해야 할 기회가 간혹 있다. 나는 한 사람과 대화할 때보다 다수 앞에서 말할 때 부담이 적다. 내게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때의 수줍음이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부담이다. 그들은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 상황에서 연출한 나의 모습만을 보고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한 사람과의 대화는 그렇지 않다. 마주하고 있는 상대에게 내가 연출하고자 하는 모습만을 보일 수가 없다. 서로 대화하다 보면 버젓이 드러나 있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굳이 확인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게 마련이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나로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캐내어 물을 때면 곤혹스럽다. 심지어 연출한 나의 모습 속에서 몇몇 심리적 행동 유인을 끄집어내 그 모습 뒤에 숨은 나를 유추하려고까지 한다.
내가 대화하는 상대 모두에게 그런 불편함을 겪는 것은 아니다. 고맙게도 어떤 이들은 내가 불편해할 만한 것들은 애써 캐내려 하지 않는다. 배려심이 깊어 보이는 이런 이들은 마주하고 있는 이에 대한 나의 경계심을 부지불식간에 해제시킨다. 무방비 상태로 드러난 나의 치부나 결함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나는 꼭꼭 숨어있는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 게다가 적절히 드러내는 나의 치부는 오히려 '진실함'이라는 덕목으로 받아들여져 상대의 환심을 사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재료가 되기도 한다.
기꺼이 내가 용인되고 있는 이들 앞에서는 강요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나의 내밀함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이때 비로소 서로를 섬세하게 더듬으며 서로를 담아내려는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초기 에덴에서의 아담과 이브처럼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던 관계의 대화다.
많은 사람이 연출한 자기 모습 뒤에 숨겨둔 자신을 열어놓지 못한다. 자신을 철옹성처럼 닫아두기만 하고 한 번도 열어 보이지 않은 사람은 어쩌면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누군가를 담아낼 능력도 누군가에게 자신을 던질 용기도 잃어버린 사람이다. 문제는 숨겨둔 자신을 열어 보이지 못한 채, 연출한 자기 모습만을 자신 인양 알고 평생을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에 가까운 외로움인지 모른 채 말이다.
강하게 보여야 하는 가면 뒤에, 유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강박 뒤에, 부모라는 권위 뒤에, 조언이나 충언을 해주어야 할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권위의 강박 뒤에, 나이라는 권위 뒤에, 세상에서 부여된 자격 뒤에, 알량한 자신의 자존심 뒤에, 그리고 자신의 패배 의식이나 어리숙함을 숨기기 위해 젠체하려는 거만 뒤에 감추어 둔 여리고 초라한 자신을 소외한 채 살아간다.
나는 조언이나 충언을 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나를 위안하겠다고 나서는 상담조차도 때로는 탐탁지 않을 때가 있다. 그들이 여린 나를 어루만지고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때는 그들이 지닌 교조적 위치와 우러를 만한 자격으로 다가올 때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자격 뒤에 숨어있는 실의와 절망, 아픔과 상처의 흔적을 지닌 내밀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다.
어떤 특수한 여건은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감사'가 성도의 기본 태도로 강요된 듯한 교회의 분위기일수록, 상대에게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의무처럼 되어버린 '감사의 강요' 앞에, 나의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괴로움, 나의 결여에 대한 아쉬움, 회의의 감정과 같은 '내밀한 나'는 억눌러야 하는 불신앙의 모습으로 치부되어 질식되고 만다.
또한 상대에 대한 나의 심상도 내밀한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나는 그와 마주하며 대화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와 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실제의 그가 아니라 그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경험하면서 유추해 낸 나의 해석의 조각들, 그에게 부여된 현재의 모습에 대한 나의 고착된 인식들의 조합으로 상정해 둔 그에 대한 나의 심상과 대화하는 것이다.
아마 내가 속해있는 교회의 교사들이 내 글을 읽다 보면 까무러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몇 글들에서 교회의 교사들이 지니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에 역행하는 듯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며 대화를 나눴던 것은 내가 아니다. 그들은 나에게 부여된 교회의 교사라는 나의 현재에 대한 고착된 인식에 사로잡힌 그들의 심상을 마주하며 대화한 것이다.
대화가 되는 사람을 원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착된 심상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서 자신을 열어 상대를 마주하고 내밀한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상대의 내밀함에 다가서고자 하는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열 수 있는 대화는 불편하고 거북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을 기꺼이 포용하게 하며 성장시킨다. '폴 투르니에'의 말대로 우리는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적나라한 자신을 통과한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내가, 나와 그것의 관계로는 다가설 수 없어 기껏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초라한 '나'와 너의 관계로서가 아니면 다가설 수 없는 나에게도 나를 받아줄 누군가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