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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진 Oct 07. 2024

■ 일상의 유목민

3년 넘게 내 머리카락을 손질하던 단골 미용사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둔다고 말했다.

“다음에 오시면 절 볼 수가 없을 거예요. 사정상 일을 그만두게 됐어요.”

“그라믄 지는 우짜라고 그만둡니꺼?”

“유능한 미용사들이 많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허허 참……․”


허탈감과 아쉬움이 약간의 걱정과 함께 밀려왔다. ‘이제 누구한테 머릴 맡겨야 하나?’ 그 미용사에게는 별다른 요구사항을 말하지 않아도 늘 기대한 대로 결과를 보여줘서 느긋하게 내 머리칼을 맡길 수 있었다.

당분간 마음에 들 미용사를 찾기 위해 방랑하게 됐다. 처음 접하는 미용사에게 내 머리카락을 맡기는 건 불안하다. 결과가 아쉬우면 다음에 머리를 손질할 때까지 한껏 멋을 내고 싶어도 그깟 머리 모양 때문에 근사하게 차려입고 싶은 의욕조차 사라지니 말이다.

한동안 유목민이 되어 여러 미용실을 전전했다. ○○점, △△점,…, 같은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운영하는 미용실이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부산의 번화가에서 꽤 유명한 프랜차이즈 본점 미용실에 내 머리칼을 맡긴 적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미용사에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주문했지만, 바리캉을 내 머리카락에 대는 순간부터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결과가 나오게 될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결과대로였다. 속으로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흡족한 듯 수고했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나왔다. ‘다음 미용사를 모험할 때까지 한 달을 넘게 버텨야 하나?’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더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운영되는 미용실에 들렀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동네에 있는 미용실을 찾아보았다. ‘물건을 모르거든 값을 더 부르는 걸 사라.’는 옛말이 있듯이 검색 후 서비스가격이 비싼 곳을 욕심내 찾았다. 그곳에 들어서니 미용사의 화려한 경력이 쓰인 광고가 붙어있다. 안내를 받고 처음 대면하게 된 미용사에게 내 요구사항을 말했다. 한참을 상의했지만 내가 요구한 대로 머리칼을 깎을 수 없다고 했다. 생경하거나 기괴한 머리 모양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지극히 평범한 모양인데도 말이다. 내 요구가 까다로웠을까? 자기로서는 그런 것을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나왔다,      

며칠 뒤 일인 미용실을 찾았는데 거기도 프랜차이즈 출신의 미용사가 있었다. 내 편견이 굳어진 걸까? 결과가 흡족하지 않았다. 한 달여가 지난 후 다른 미용실의 미용사에게 모험을 감행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정착하게 된 미용사를 드디어 알게 됐다. 몇 차례 프랜차이즈 미용실을 경험하고 거기서 경력을 쌓은 미용사들한테 내 머리칼을 맡긴 후 괜한 편견이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그게 편견만은 아니었다. 프랜차이즈 미용실에서는 성행하는 머리 모양을 연출하는 기술만을 양산형으로 가르치다 보니 그 밖이 다른 방식으로는 기술을 익히지 못했나 보다 하는 생각이 착각은 아니었다.      


미용실의 사례에서 보듯이 성행이라는 대중성의 권력에 개별적 요구가 파묻힌 경우는 적지 않다. 어렸을 적 서울에서 이사 와서 이곳 영남지방에서 알게 된 음식이 있는데 노란 ‘콩잎장아찌’였다. 이웃집에서 갖다 준 처음 먹어보는 반찬이 왜 그리 맛있던지. 어머니는 곰삭은 냄새가 나는 그 음식이 뭐가 그리 맛있냐고 의아해하셨다. 소금물에 푹 삭힌 콩잎장아찌는 그 퀴퀴한 냄새가 입맛을 돋운다.

얼마 전 반찬가게에서 빛깔 좋은 콩잎장아찌를 사 왔다. 흰쌀밥과 같이 먹으려는데 도무지 입맛이 돋지 않는다. 분명히 어릴 적부터 봐 왔던 그 ‘콩잎장아찌’랑 다를 바 없는 음식인데 전혀 기대했던 맛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콩잎장아찌에서 기억나는 그 냄새가 나지 않는다. 퇴근길에 그 반찬가게에 들러 콩잎장아찌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그 냄새를 역하다고 하길래 없앴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그게 콩잎장아찌다운 건데 그걸 없애다니…․’ 무늬만 ‘콩잎장아찌’ 일뿐 고유한 특색을 잃어버린 이도 저도 아닌 음식이 된 것만 같다.

동네에 새로 생긴 청국장 전문점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문한 청국장이 식탁에 차려졌는데 ‘청국장’ 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 냄새가 나질 않았다.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온 방 안을 진동하던 그 퀴퀴한 청국장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한쪽 벽에 ‘잡내를 제거했다.’라는 문구가 선전하듯 쓰여있다.


대중성의 권력은 콩잎장아찌와 마찬가지로 청국장이 지닌 그 고유한 특색에 매료된 소수의 개인을 외면한다.     

즐비한 프랜차이즈 미용실 숲에서 방랑하던 나는 이제 평범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마저 찾아 헤매야 하는 유목민으로 떠돌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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