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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진 Oct 12. 2024

■ 말더듬증

지금은 흔적만 아련하게 남아있지만 나는 극심한 말더듬이였다. 내가 말을 더듬었던 것은 꽤 어렸을 적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나에게 말더듬증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웃집 아저씨가 자기 어린 아들이 행여나 내게서 말 더듬는 걸 따라 하게 될까, 우려해서 말을 더듬지 말라고 지적한대서 알게 됐다. 처음엔 그 말을 듣고서도 내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제가 말을 더듬는다고요?’ 내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니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말할 때 내가 심하게 말을 더듬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말을 더듬는 것에 별말이 없으셨지만, 아버지는 누차 지적하셨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말 더듬는 걸 자꾸 지적하면 오빠도 그걸 의식하게 돼 오히려 말더듬이 굳어진다고 그러지 마시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말더듬증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데에 적지 않은 장애였다. 긴요한 부탁을 해야 할 때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나를 아는 사람에겐 종종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주저했고 초면인 사람에겐 내가 어눌한 사람으로 비칠까 봐 늘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런 나를 의지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 안에 그런 부끄러운 일면이 있다는 걸 수긍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숨기고 싶은 나를 스스로 끄집어내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 앞에 있는 문제  다가설 수 없다. 사소한 문제 앞에서도 드러내기 부끄러운 결함이나 말하기 민망한 잘못이나 실수는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머뭇거리게 한다.

말을 직업으로 삼거나 말을 일로 삼아야 하는 처지에서는 말이 어눌하고 더듬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다. 몇 해 전, 교회에서 6학년 아이들을 맡게 된 첫날 그 사실을 밝혔다. 그뿐 아니라 나의 다른 부끄러운 결함도 스스럼없이 먼저 말했었다. 그래야 이 아이들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가르치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쭙잖은 어른이지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이기 이전에 그들보다 한참 생을 먼저 산 사람으로서 한 인간을 보여주고 이해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인격 성장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특하고도 생각보다 훨씬 성숙한 이 아이들은 그런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살면서 일어나는 문제 중에서 불가항력의 문제는 매우 드물다. 대개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해결될 문제들이다. 해결이 쉽다면야 굳이 문제라고 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곤란을 겪을 때가 많다. 문제 그 자체보다 나의 수치스러운 결함이나 어처구니없는 잘못이나 실수로 생겨난 문제일 때 더욱 그렇다. 어린아이들에게나 있을 법한 이런 것들은 평생을 두고 우리를 따라다닌다. 성경의 인물 중에도 온전한 사람으로서 신의 과업을 이룬 인물은 흔치 않다. 많은 인물이 자신이 안고 있는 결함과 문제로 평생을 두고 씨름한 사람이었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서기에는 발음기관의 장애라는 치명적인 결함과 강박증이 있었고 ‘입다’에게는 수치스러운 개인사가 있었고 ‘에훗’은 극도로 멸시받던 왼손잡이였다. 그럼에도 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에게 이루어야 할 과업을 부과했다. 신은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정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결함이나 내재한 문제 때문에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책임을 면책해 주지는 않는다. 신은 우리가 불완전하더라도 우리 앞의 삶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우리는 현재를 극복하며 영혼을 단련한다.


이 글을 쓰는 금요일인 오늘, 나는 대상포진을 앓고 있다. 지난주부터인가 임파선이 있는 부위와 오른쪽 하복부와 등에 간헐적으로 통증이 있더니 사흘 전부터 아랫배에 아메바같은 피부 발진이 보이고 지금은 허리를 거쳐 다리로 군집을 이루며 번지고 있다. 보기에도 흉측하지만 살을 에는 듯한 통증에 지난밤은 온전히 뜬 눈으로 지새웠다.

당장은 출근이 걱정이다. 출근 때까지 얼마나 차도가 있으려나? 고된 일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증상과 통증이 양보해 줄지 의문이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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