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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진 Oct 18. 2024

■ 자유와 관용

예전에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습격당했었다. 고대 정치사에서부터 본다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테러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처럼 정치 이념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서로를 적대시하는 사례는 얼마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정치 이념의 갈등은 종교 간의 갈등보다 과민하다. 나도 정치 성향이 판이한 아버지 앞에서는 가급적 정치적 언행을 삼간다.     

사회의 발전을 당위라고 한다면 이 갈등은 이 당위를 가로막는 우리나라에 고착된 사회적 병폐다. 지난날 ‘한국동란’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은 지금까지도 골 깊은 상흔으로 남아 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때로 선동과 군중심리에 의해 다수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중우정치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의결 방식의 폐단으로 지목되어 왔다.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이 비방하는 이러한 중우정치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충분하고도 허심탄회한 토론과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친 의견조합과 표현의 자유(허용)가 필요하다.

여기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밀(J. S. Mill)이 말한 바대로, 배중률의 원칙을 따라야 하는 것이나 공리(axiom)가 아닌 혜안과 대안으로서의 진리는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이념에 일방적인 형태로 주어져 있지 않으며, 어느 한쪽에 진리의 양이 치중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반대편에도 일정 부분이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의 우선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이 속한 진영과는 사상, 이념, 의견이 다른 진영의 그것들은 악으로 간주되어 보지도 말고 만져서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극단적인 경향의 어떤 집단이 주야장천 부르짖는 구호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실체적 의미로서의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상대를 적대하기 위한 논리가 실체적 의미를 대신할 뿐이다. 경제에 관련된 일간지의 사설을 봐도 하나의 학파에만 일방적 권위를 부여하여 상대 학파를 기조로 한 경제정책을 재단한다.     


자유의 전제는 독립성과 자율성이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 의견에 따른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때, 우리는 우리의 관성적 편견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위치에서 행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와 뜻을 달리하는 진영의 논리를 받아들일 때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우리가 속한 진영을 지배하는 교조적 사유체계 내에서 여과되고 재생산된 형태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특정한 방향으로 태도를 결정짓게끔 유도된 형태인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위치가 순진무구한 백지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사유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과 사유의 진전이 있으려면 판단과 사유의 기저가 되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상대가 주장하는 가치는 나의 가치 신념에 어긋나는 것뿐일까?


잠시나마라도 편견과 증오를 잠재우고 상대의 목소리에 직접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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