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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진 Oct 07. 2024

■ “고집하고는…”

“여기에 이거랑 이거 넣어서 비벼 먹어봐. 맛있단 말이야. ”

“싫어, 그냥 이렇게 먹을 거야.”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서 먹어봐.

어이구, 하여튼 고집하고는


어렸을 적부터 누누이 듣던 말이다.     

어렸을 적 이웃집에 나보다 3살 아래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느 여름날 아이는 햇볕이 닿은 툇마루에 앉아 그림 그리기 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름을 주제로 하다 보니 방학 동안 해수욕을 했던 즐거운 기억을 그린다. 배운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깔끔하게 잘 그린다. 색칠 하나하나에 무척 정성을 들인다. 아이는 지나칠 정도로 세심한 묘사에 고집을 부린다.     


“뭐 한데 갈매기를 그렇게 눈, 주둥이(부리), 몸통을 일일이 다 그려 넣고 있어. 그냥 3자로 그리면 될 걸…․”


아이의 엄마가 하도 답답한 듯 쏘아붙인다. 그런데도 아이는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갈매기조차 대충 그리는 법이 없다.


“싫어…․”

“갈매기를 너처럼 그렇게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고집하고는…․”     


창작 의지로서의 고집에 대한 타인의 관여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아무래도 창작 활동이나 예술 활동을 하는 이들은 자아의지가 비교적 강한 사람들이다. 자기 반영으로서의 작품 활동을 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술가적 소질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지만, 나에겐 글자를 도안하고 꾸미는 데에 약간의 재능이 있다. 오래전 교회에서 행사를 위한 장식 때문에, 한 교역자가 내게 글자 장식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머릿속에 그려놓은 구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공들여 글자를 도안하고 장식했다. 공들인 만큼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작업한 장식물을 그 교역자에게 갖다주었다. 이튿날 행사 때가 되어 교회에 갔더니 내가 만든 장식물이 원래 만든 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해체되어 다른 결과물이 되어 붙어 있었다. 기분이 조금 언짢았다. 이런 나를 까탈스럽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만의 생각, 나만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의 반영으로서 거기에 있다. 그에 대한 아무런 의논과 합의가 없는 관여는 고유한 나에 대한 침범으로 여겨졌다.     


“고집이 세다.”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개 이 말이 나오게 되는 경위나 상황을 보자면 두 개의 자아의지가 충돌할 때이다. 하나의 자아 의지가 다른 자아 의지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거나, 다른 자아 의지를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려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오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그 말(“고집이 세다.”)을 들어야 하는 사람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고집이 세다는 방증이다. 이 말은 어른은 물론이고 아직 정신이 여물지 않은 아이에게는 더더욱 개성과 독자성을 위축시키는 억압이 되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그 말을 내뱉기 전에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보다 그 말을 하는 자신의 정복적 자아부터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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