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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진 Oct 12. 2024

■ 글쓰기가 주는 위안과 도전

“무슨 일을 하시나요?”

“삼촌은 무슨 일을 해?”

“…”

누군가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구차한 설명 없이도 그 일이 나를 말해 줄 수 있음은 엄연한 자부심이 된다. 아무리 단조로운 일이라도 그렇다. 그렇게 내가 하는 일로 나를 말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일의 결과가 나를 말해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움트기 시작했다. ‘고유한 내’가 드러나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에 부합되는 일로 떠오른 것이 ‘글쓰기’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창작 활동에 비해, 보다 직설적이고 명료하게 자신을 말하는 작업이다. 자신을 말해 주는 일로서의 글을 쓰는 작업은 단지 자신에 대한 서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글 자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고유한 자기다움의 나타내는 일이다. 같은 주제, 번역과 같이 같은 내용의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색깔로 나타난다. 그렇게 자신을 말하는 일로서의 글 쓰는 일에 대한 동기부여와 시도는 암흑의 시기를 사는 나에게 스며든 희미한 한 줄기 빛이다.     


글쓰기를 작정한 때부터 메모하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글감으로 쓰기 위해 순간순간 문장의 형태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망각의 먼지에 뒤덮일까 봐서다. 아니나 다를까 메모해두지 않은 채,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제때 쓰지 않고 미루어 두니 그새 글감은 수북한 먼지에 파묻혀 흔적조차 가물가물하다.     


글쓰기는 과연 나의 남은 생을 지탱할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고작' 글쓰기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나의 남은 생을 걸다시피 하는 것은 무모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나 역시 그렇다), 지금의 나의 처지에서는 한낱 여가 활동이나 부수적인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제대로 된 밥벌이로 기대하기에도 석연찮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내 안의 영웅과 만난다. 글을 쓰는 자로서의 그는 비천하고 암울한 처지의 나를 그저 애처롭게 관조하며 위안만 하는 무력한 위로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태평하고 아쉬울 것이 없을 때보다 불안과 절망, 두려움으로 동요될 때야말로 오히려 다채롭고 위력 있는 글을 쓸 기회라고 독려하며, 생명력을 잃은 채 기계처럼 움직이는 답답한 현실에서 나에게 해방처를 제시하는 진취적이고 용감한 자다.

그런데 그런 영웅적인 그는 과연 내 삶의 전위대가 될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일 자체로만 본다면 그 일은 다른 일들에 비해서 독립적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의존적이다. 심지어 일기도 그러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글에 주목하고 반응할까?"

"나는 일상에서 글이 될 만한 의미들을 얼마나 꾸준히 캐낼 수 있을까?"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읽힐 가치가 있을까?"

"글을 쓰는 자로서의 나는 호응의 가뭄에서도 용감한 전위대의 역할을 이행하며 여전히 글을 쓰라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을까? “

그는 뻔뻔스럽게도 내가 글을 쓰도록 독려할 뿐, 그 글에 대한 반응이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책임의 영역 밖이라 말한다. 그런데도 이 뻔뻔스러운 자는 마음먹은 일을 지속하라고 부추긴다.

극심한 가뭄에 대한 염려 때문에 경작하기를 두려워 주저하는 것은 경작할 행동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는 나에게 염려의 동기가 나의 무력함을 합리화한다고 꾸짖는다.     


또한 그는 영웅적인 면모로써 내게 다가올 뿐만이 아니라 가장 위력 있는 글은 진실함이 깃든 글임을 주지 시키면서 겸허의 미덕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스스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경쟁과 비교로부터 보잘것없는 나를 숨기기 위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굳혀진 이 거만한 자아와 싸워야 한다, 잠재된 열등의식을 감추려는 거만한 ‘나’는 글의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려 한다.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을 현학적인 미사여구나 일상적이지 않은 용어를 남발함으로써 우쭐대고 싶은 저열한 욕구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이런 저열한 나를 평생을 걸쳐 끊임없이 싸운다고 해서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글을 쓸 때 요구되는 소양을 갖추기 위해 잠시나마 겸허해지는 척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나는 아직 삶이 글이 되고 글쓰기가 삶이 되기에는 갈 길이 먼 햇병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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