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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Oct 26. 2022

내가 선택했다는 착각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평행우주

C'est la vie.
그것이 인생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수많은 평행우주의 대혼돈 속에서, 관계의 온도를 적절하게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렇다. 지나치게 혼란스럽고 총체적 난국인 이 영화가 얼마나 좋았든, 취향에 얼마나 잘 맞았든간에, 다 떠나서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주제면에서도, 시각적 연출에서도, 이야기 서사 부분에서도 모두 아주아주 흥미로웠다.


한 친구는 감상 직후에 나에게 연락했다. 혹시 영화를 봤냐며,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고 물어왔다. 평행우주에 대한 내 입장과 철학이 궁금하다고 했다. 나라면 뭔가 이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해봤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평행우주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있나? 나도 잘 모르겠어서 의아해졌다.


처음에 친구의 그 질문이 나에게 촉발한 생각은, 이런 평행우주 세계관을 다루는 영상컨텐츠로 내가 익숙한 건 프랑스 스캄3이라는 점이었다. 자신의 멍청한 선택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고 이별한 엘리엇은, 루카스와 이별하지 않은 또다른 평행세계를 그려낸다. 대충, 이별해서 외따로 살아가게 된 “37483628번째 루카스와 엘리엇”(현실)은 불행하지만, 다른 우주의 ”574728번째 루카스와 엘리엇”(다른 세상)은 함께, 한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식이다. 엘리엇은 루카스의 겉옷 주머니에 짧은 만화를 그려서 두고 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원 올 앳 원스>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모든 선택의 분기점을 만나며 수천 명의 에블린이 탄생한다.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결말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다른 선택지가 많지만, 난 그럼에도 당신.”


이것은 분명 강력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유일한 메세지다. 우리에겐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라 음악가가 되었다면?”, “내가 만약 집안 어른들이 반대한 사랑이 아니라 똑바른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면?” 이 모든 가정은 사실 ‘다른 선택지’가 아니라, ‘내가 걷지 않은/않을 길’에 불과하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통념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많은 것을 직접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실제적인 결정력이나 주체성과 별 관련이 없다. “내 행위가 주체적 선택”일 거라는,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와 더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인 레타나 살레츨(2014)에 따르면, 선택 이데올로기는 해방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선택 이데올로기의 역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선택을 부추기며 결과에 엄청난 무게를 지우고, 이로 인해 개인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죄책감과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그것이 어떠하리라 기대되는 것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는다. 즉, 한다(do)는 것은 할 수 있다(can do)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다학제연구자 정희진(2018)은 끔찍한 사회범죄에 관해, 쏟아지는 경악(‘어떻게 사람이 그런짓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가해자들은 그럴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They do because they can). 이렇게 자명한 이치 앞에서 성악설, 성선설, 인과론, 구조적 시각 등등이 무슨 소용 있으랴. 간단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럴 수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행위(doing)에는 당연히 책임(re/sponsibility)이 따른다. 책임은 당연하게도 행위자인 내가 지는 것이지만, 그 기원을 묻는다면 선택의 행위는 온전한 나의 몫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삶은 가혹하다. 가장 무서운 책임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내 삶의 지속되는 축적과 누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전히 흥미롭고, 훌륭하고, 대단하다. 어쨌든, 헤매며 지나온 모든 길목의 끝에서, 그러니까 지금에, 나의 모습은 나와 함께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내가 선택한 건 당신...’ 그러나 그 대상이 나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든, 이미 멀어진 사이이든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에블린과 딸, 에블린과 남편의 관계를 보여줬지만, 나는 이것이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의 가족애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 <언더테일>(2015)의 명대사처럼,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당신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현재 삶으로서 존재한다. 오직 지금의 나의 모습이 나와 함께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 기반에서 작동한다.





오늘 회사에 출근했을 때, 일에서 한참 선배이고 나보다 나이도 많으며 내가 애정하는 동료가 내 몫까지 회사 사람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선물 받아서 얼른 사용해야 하는 기프티콘으로 구매한 것이었고, 다정하게 내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까지 기억해내서 구매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회사 동료 또는 상사가 당신이 불매하는 브랜드의 음식을 사와서 권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떠오른 선택지는 이 정도였다.


A. 이미 샀으니까 그냥 먹는다.

B. 사회생활해야 되니까 그냥 먹는다.

C. 이유를 거짓으로 둘러대고 사양한다.

D. 불매한다며 사양한다.


출근하자마자 마주친 약간의 혼란 속에서 일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퇴근할 때쯤 생각이 전보다 정돈됐다. 다음에 또 일이 생기면, 웬만해선 안 먹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양한다고 큰일나지 않기 때문이다(이처럼 사양할 수 있는 것도 상황적 조건이다).


상황을 설명하고나서 내가 감내해야 할 많은 불필요한 감정과 상황이 불편하다면, 음식을 사양하는 이유를 불매라고 투명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냥 이 브랜드를 싫어해요”라고 말하고,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얼버무리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니! 단지 ‘안 먹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보이콧 효과가 있겠지 싶다.


간단한 디저트 음식을 권하는 입장에서도, 사실 한 사람이 거절한다고 해서 그의 내밀한 자존심에는 별로 타격이 없는 게 일반적이다. 누가 안 먹으면 다른 동료 아무나 주면 된다. 현상적으로 음식을 포장해온 행위 동기를 생각해보면, 나 한 사람이 그걸 먹고서 좋아하는 게 목표가 아닐 것이다. 사온 자기 성의를 보여주고 싶었을 테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양하는 것 하나로 얻게 되는 이점은 많다. 도덕적으로 기피하고 싶고, 말그대로 ‘사양‘하고픈 즐거움(음식)이 내 입으로 안 들어온다는 점에서도 좋고, 보이콧이 전시되는 점에서도 좋다. “어라? 이 브랜드 싫어하는 사람도 있네?” 그럼 구매행동이 감소하지 않을까 싶어서 굉장히 희망적이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내가 먹을 음식 하나 거절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나를 보면서, 또 한번 내가 얼마나 조건에 얽매인 존재인지 깨닫는다. 단순히 깊은 이유 없이 어떤 맛을 싫어하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고민 안 하고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 불매행동에 대한 동참이라는 진실된 동기가 드러나는 것이 껄끄러워서, 예민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낙인이 두려워서, 그래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가치관이 드러나는 거절을 머뭇거리게 되는 상황에서 다음부턴 좀 더 속편하게 대담해져보자고 생각하고 다짐한다. 실패한다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죄책감은 나와 함께할 것이다. 불매해야 할 브랜드를 ‘내가 선택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니,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유연하다고 해서 책임감 없고 나쁜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유연하게, 동시에 치열하게 사는 삶을 지향하는 이유이다. 에블린이 너그럽게 끌어안고 포용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과거에 저지른 모든 선택들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의 자기 삶이 갖는 부정성까지도 유연하게 긍정한 것이다.






지나치게 걱정을 했었나봐

나쁜 사람 될까 두려웠었나봐

이젠 아냐 혹시나 니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이런 저런 얘기를 해도

아무리 네 얼굴이 어두워져도

내가 내키지 않으면

거절할 거야


장기하와 얼굴들 - 거절할 거야




somebody shoulda told me "c'est la vie"

standing all by myself

and no one to love or trust

(...)

i'm playing with the fire

and i know it will hurt me

and tear me apart till i don't wanna live again


SOLE - l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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