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을 자랑하는 5월. 꽃이 피고 만개하는 가장 아름다운 달. 많은 사람이 그 장관을 감상하기 위해 모여드는 시간. 꽃을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가족, 연인들을 바라보면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에 온기가 가득해 보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지만 갖가지 색의 꽃이 만개한 모습을 보면 5월만 같아도 될 듯싶다. 5월은 천주교에도 특별한 달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달이라 하여 ‘성모성월’이라고 불린다. 성당 성모상 앞에는 꽃이 놓여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특히 깊다. 오죽하면 가톨릭은 마리아를 경배하는 종교라고 하겠는가. 명확히 하면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지 않는다. 예수의 어머니로서 공경하는 거다. 어머니의 존재는 얼마나 위대한가. 남성이 가정을 위해 밖에서 일상을 보냈다면 돌봄을 책임진 사람은 여성이었다. 이젠 그러한 구별이 사라지고 양성, 노인, 아동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가지만. 어머니라는 정체성은 대체 불가한 가치다. 그런 의미로 성모 마리아를 대하고 있다.
지난주는 가톨릭 달력(전례력)상 예수의 부활 성령강림대축일이었다.
성령강림대축일. 이날의 기원은 서기 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해 4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발생했다.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 사람인 예수가 신성모독과 율법을 거슬렀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다. 예수가 죽자 그의 열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열두 제자. 예수가 직접 뽑았던 제자들이 예수의 추종자라는 이유로 처벌받는 게 두려워 도망쳤다. 그중 수제자였던 베드로 역시 예수라는 사람은 누군지 모른다며 세 번이나 부인한다. 희망이 없어졌다고 느낀 순간. 끝이 아니었다. 예수는 사망한 3일째 되는 날 부활했다. 예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기 전까지 믿지 않았겠다던 토마스 역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의심을 버렸다. 그리고 예수는 40일간 제자들에게 수차 나타나며 부활을 알렸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여러 기적을 행하는 걸 눈으로 직접 보니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생겼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예수가 40일 후 하늘로 올라가자 제자들은 다시 두려움에 떨었다. 예수가 곁에 없다는 불안과 혼란은 그들을 다시 예수를 부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예수가 승천한 지 10일째 되는 날은 '오순절'로 모세가 신에게서 십계명을 받을 걸 기념하는 경축일이었다. 경축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유다인들이다. 유다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를 죽게 만든 사람들 아닌가. 그들이 두려워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있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공포의 순간이었을 테니.
제자들은 당연히 유다인들의 거룩한 장소인예루살렘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예루살렘에서 성령(Holy Spirit)을 기다리라고 했던 예수의 말 때문이었다. 제자들의 간절함이 닿았던 걸일까.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던 그들에게 성령이 왔다. 성령의 은총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을 나올 준비가 됐다. 더 이상 비겁하고 무기력하지 않았다. 당당히 탄압과 맞서며 복음을 전파한다. 특히 제자들의 모국어가 아닌 듣는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방언 현상으로 하루 4천 명이 세례를 받기도 한다. 그리스도 교회의 탄생이었다.
권력에 순응했던 제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마지막에는 순교한다. 현실의 벽과 두려움에 맞서기란 예나 지금이나 힘들 텐데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정의 내리긴 어렵겠지만 난 그들이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포기한다면 헌신 역시 나오지 않을 거라고 느낀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각자의 여정이라고. 남을 위한 최우선 희생이 아닌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수많은 유혹과 역경을 이겨낸다. 그리고 그러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 지향점일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