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며칠 춥던 날씨가 조금 풀렸다.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커튼을 열었다. 반짝이는 햇살이 길게 거실로 밀려 들어와 자리한다. 빨래가 보송보송 잘 마를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빨래가 빛의 호위를 받아 건조되듯 나의 기분도 따스해진다.
2004년 문예 중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여자에게 길을 묻다』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조해진 작가가 쓴 『빛의 호위』는 2014년 제5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이다.
빛의 호위는 빛의 따스함을 통해 인간을 살리는 내용이다.
책의 첫 장면에서 들려오는 둥글고 투명한 세계를 감싸주던 멜로디는 궁금증과 함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등장하는 녹슬고 찌그러진 현관문 안의 풍경이 동그란 조명 안의 그림처럼 비친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보이는 느낌. 둥근 망원경을 통해 보는 그림 같았다. 나는 책을 읽으며 작가의 의도치 않은 의도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둥근 렌즈를 통해 모든 사물을 보게 되었다. 망원경을 거꾸로 보면 멀고 작아 보이는 풍경들이 제대로 보면 크고 가깝게 보이는 신비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화자의 눈으로 말하는 장소들은 카메라의 둥근 렌즈를 통해야만 보였다.
일요일의 눈 쌓인 운동장도,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눈을 맞고 있는 권 은의 모습도, 렌즈를 통해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화자의 머릿속에 아련한 추억일 때도 있고, 남에게 들은 이야기일 때도 있으며, 신문의 한 장면일 때도 있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어둡고 추운 방 허름한 외투를 껴입은 채 담요를 뒤집어쓴 권 은의 모습과 램프를 켜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식료품점 지하창고 안의 알마 마이어가 오버랩되어 보였다. 빵을 담은 바구니와 악보 한 장을 건네주는 장. 아버지의 카메라를 훔쳐 갖다 준 반장은 그들에게 인간을 살리는 한 줄기의 빛이었다. 조명 밑에 알마 마이어는 소리 없는 바이올린을 켜고 권 은은 허기와 추위를 잊으려 눈 내리는 오르골의 태엽을 돌리고 또 돌리면서 그 멜로디가 멈추기 전 잠으로 도피하곤 했다. 그리고 카메라의 빛을 따라 어두운 동굴 같은 집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온다.
알마 마이어가 장에게 받은 식량 바구니에도 악보가 조명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식료품점 지하창고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도 그녀는 무대의 조명 아래 서서 소리 없는 관객들을 향해 연주했으리라.
권 은은 알마 마이어에서 본인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권 은이 반장에게 혼자 있는 것을 들켰을 때 그리고 반장으로부터 자신을 감춰주기를 원했던 일들이 알마 마이어와 장 베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권 은은 알마 마이어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것은 동질감이 느껴지는 알마 마이어 앞으로 쓴 글이지만 권은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었을까?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69p
이 문단으로 전쟁의 참혹함은 설명이 된다. 그 아픔은 읽는 독자의 마음을 찌르는 포탄이 되어 터진다. 전쟁으로 만들어진 눈물의 강이 흐르고 넘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자연재해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변변한 곡도 발표하지 못한 장 베른을 사진으로 삼십 년 가까이 지켜봐 온 노먼 마이어는 그의 사진들을 떠 올리며 이런 다짐을 했다.
–그가 인생에서 했던 가장 위대한 일을 내 삶에서 재현해 주자는 다짐이었죠. 쓰레기 같은 전쟁에서 죽을 뻔했던 여성을 살린 그 일을 말이에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나는 믿어요-66p
전 재산을 털어 구호품을 싣고 전쟁터로 향하던 그는 결국 포탄에 숨을 거둔다.
권 은은 또 다른 장 베른을 만나지만 반장은 권 은을 기억하지 못한다. 권 은은 반장에게 단서를 하나씩 흘리며 시리아의 난민캠프로 떠난다. 반장은 그 단서들로 일용할 양식으로 사용하라고 주고 온 카메라가 권 은으로 하여금 빛을 찾아 나오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던 사진작가 헬게 한센. 그로 인해 사진작가가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분쟁국에서 난민들의 사진을 찍는 그녀에 대해 알기 위해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면 보이는 화려한 악기상점, 그리고 빛의 호위를 받으며 태엽이 멈추고 눈이 그친 뒤에도 어떤 멜로디는 계속해서 그 세계에 남아 울려 퍼지기도 한다는 것, 간혹 다른 세계로 넘어와 사라진 기억에 숨을 불어넣기도 한다는 것 역시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67p
아름다운 기억은 서로를 만나는 것에 빛을 더한다. 이로써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빛의 호위』는 떠나지 않고 있다. 그 작고 아름다운 빛은 삶이 되기도 희망이 되기도,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제 길을 걷다 악기상이 보인다면 그냥 지나 치기 어려울 것 같다.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피사체를 감싸주는 빛들로 인해 다른 세계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