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14 - PMF is around the corner
2023년 초에 미국으로 넘어와 우리는 더 큰 시장을 위해 프러덕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피벗팅까지도 고려하며 마켓 리서치부터 현업자들 인터뷰까지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밟아왔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고객을 유치하지 못했고 최선을 다 한다는 것 만으로, 열심히 한다는 것 만으로는 진전이 없다는 걸 느꼈을 때 마치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그 기나긴 터널을 지나 매 월 4~5개의 신규 고객사가 들어오고 있고 MRR은 매달 1.5배, 단기 매출은 지난달 40배까지 뛰었다. 미국에서 업계별로 선두를 달리는 꽤 유명한 브랜드들이 우리 서비스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 세일즈 미팅 이후 전환은 80%가 넘으며 한번 사용한 고객은 100% 잔존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단기적인 수치에 우리가 PMF를 찾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느낌은 온다. Oh, PMF is around the corner.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단지 몇 가지 착각에서 벗어난 것뿐이다.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노력하지 않아서 몰랐던 착각이 아니라, 너무 잘하고 싶어서 너무 열심히 해서 시장은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린 낙관적 자기 위안에 더 가깝다.
좋은 문제란 고객이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아직 정답을 찾지 못한, 그래서 누구라도 그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돈을 더 낼 의향이 있는 패인 포인트이다. 그래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문제가 실존하는가는 당신의 고객이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노력, 즉 투자를 해왔는가로 측정해야 한다.
여기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 건강주스를 매일 마실 의향이 있는지 물어본다면 높은 확률로 Why not?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사람은 끝까지 당신의 건강주스를 사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물어봐야 한다. 건강을 걱정하여 건강주스를 매일 만들어 먹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당신이 조금 더 얘기 나눠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왜 매일 건강주스를 마시고 있는지, 매일 준비하는 과정에 불편한 점이 있는지, 그래서 다른 대안을 찾아본 적이 있는지, 이런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누가,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 당신의 건강주스를 바로 사줄지에 대한 이상적인 고객군까지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에 넘어오자마자 수 십 개의 자사몰 대표, 마케터들과 1:1 인터뷰를 했다. 지인이나 소개도 아닌 외국인으로서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들이 대부분이었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놀랍게도 연매출 100억 이상이 되어야 고객 잔존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 이하의 브랜드들과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브랜드: 고객잔존 정말 중요하죠!
나: 그럼 어떤 액션을 해보셨나요?
브랜드: 아 아직 해본 건 없어요.
나: 왜 아직 안 해보셨나요?
브랜드: 지금은 신규고객 유치가 더 중요해요. 아직 회사가 작잖아요.
한국과 전혀 다른 기준점이라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런 고객에게 고객 잔존 서비스를 아무리 팔아도 구매하지 않을 것이다. 이 대화는 내가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지 실제로 이런 깊이까지 들어가기 위해 계속해서 과거를 묻는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앞서 말한 착각으로 돌아간다. 마치 고객이 내 서비스를 구매해 줄 거라는 착각.
문제가 실존하고 당신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솔루션을 개발했다고 해서 고객이 당신의 서비스를 구매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고객이 들었을 때 타당한 솔루션이어야 하는데 보통 문제해결적합성(Product Solution Fit)이라고들 하더라. 예를 들어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캡슐 한알로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을 소개한다고 하자. 과연 구매할까? 건강주스를 마시는 사람은 배도 어느 정도 부르고, 맛도 있어서 건강주스를 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솔루션이라고 해도 고객의 마음을 얻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도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갖추자마자 가능한 많은 USP 가설을 만들며 계속해서 고객과 소통하며 반응하는지 실험했다. 분석도구, 추천 시스템, CRM 등 여러 가지 제품을 대변하는 문구들을 작성하여 빠르게 웹사이트를 바꿔가며 고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테스트했다. 처음 분석도구를 버리는 데에는 약 5개월 걸렸다. 문제가 실존한다고 믿었고, 좋은 솔루션을 알아보지 못하는 고객을 탓했다. 그다음 USP였던 추천 시스템을 버리는 데에는 3개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다음은 2개월, 그다음은 더 짧아졌고 여러 가설 중 하나였던 지금의 USP가 좋은 성과를 만들어 냈다.
사실 모든 USP 테스트 미팅에서는 고객들의 반응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관심 있을만한 주제를 던져주었고 새로운 솔루션을 가져왔으니 흥미를 가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구매로 이어지진 않는다. 여기서부터가 지옥의 시작인데 대부분의 창업자들은 미팅이 잘 진행됐기 때문에 세일즈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매몰비용은 높아지고 끝내 포기하지 못하게 된다.
놀랍게도 우리는 지금 고객이 사용하는 프러덕이 없다. 기능을 제공하는 백엔드만 있고 이 기능들은 기존의 툴들과 연동된다. 그래서 고객은 우리 프러덕을 보지도 못한 채 계약을 하고 비용을 지불하는데 신기하게도 계약 성공률은 최근 80%가 넘었다. 산업 평균에 3배 정도 된다. 초반에는 계속 USP를 반복적으로 테스트하면서 매번 랜딩페이지를 바꾸고, 프러덕을 수정하며 있을지도 모르는 고객과의 미팅을 준비했었다. 그러다 리드를 모집하는 앞단에서부터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하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곤 했는데 이는 시간과 비용의 낭비뿐만 아니라 모든 팀원을 지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프러덕 대신 서비스 소개서나, UI 디자인 정도만 가지고 세일즈 미팅을 셋업 했었고 나중에는 이마저도 거창하게 느껴지자 마지막에는 말 한마디로 반응을 보며 의사결정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일화는 지금의 USP는 뉴욕에서 있었던 소비자 테크 컨퍼런스 쇼에 부스를 빌려 참가했을 때 첫날 컨퍼런스 시작 15분 전에 팀원들끼리 나온 얘기였다. 브로슈어도 없이 말로 서비스를 설명했는데 꽤 관심도가 높아 보였다. 그날 저녁 브로슈어를 전면 수정하고 다음날 주변에 있는 Staples에 가서 출력했다. 그 결과 어땠을까? 이때부터 우리는 고객들의 앞단의 반응부터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컨퍼런스 기간 중 당일 설치된 고객도 있었다. 미국에 온 이래로 처음이었다.
사실 이 모든 내용은 Mom Test라는 책에 담겨있다. 만약 모두가 당신의 서비스가 좋다고 하지만 정작 아무도 구매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스타트업에는 정답이 없다. 지름길도 없다. 노력한다고 다 잘 되는 일도 아니다. 우리 서비스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과한 믿음을 내려놓고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니 실력이 생겼다. 한 끗 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