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다 Jun 21. 2024

아집을 위한 신념.

그릇된 자존심을 위한 어리석은 고집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무언가가 '틀렸다'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


그건 순간이 될 때도 하루가 될 때도 그리고 평생이 될 때도 있다.


먹는 것 입는 것 하는 것부터 종교에 이르기까지 장르도 다양하다. 


인생은 늘 기로에 서서 선택의 연속이 이어진다.


짜장과 짬뽕을 고르는 일조차 그렇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세상에 두 가지 메뉴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인생에 맞다 틀리다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닐지언정 그 길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늘 다툼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서로에게 서로의 의견을 설득하려는 데에서 시작된다. 


누구 하나 한발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다.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도 한다. 


이게 길어지면 처음의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의견은 아집이 되어버린다. 자존심싸움이 되어버린다. 지기 싫을 뿐이다. 의견과 생각은 그저 핑계일 뿐. 


이 지점이 위험한 것은 나 스스로도 그것에 설득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갈래의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보이지 않고 그저 억지를 쓰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하지만 내심 알고는 있다. 나 역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그저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종교에 대한 다큐를 보았다. 

흔히 사이비라 부르는 종교에 대한 다큐였는데 딸들의 인터뷰가 있었다.

교단에서 파는 만병통치의 효능이 있는 샘물을 산다는 걸 말려도 듣지 않고 거액을 주고 사서 마신 엄마는 아무 효과가 없었지만 딸들에게는 나았다고 말하면서 남몰래 고통을 참더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병원조차 가지 않은 채로. 


이건 종교적 믿음인가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고집일까. 


그럴 때마다 내게도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엄마가 썩은 고구마를 골라내더니 깍둑썰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 혹시 하려는 게 맛탕이야?"

그즈음에 나는 학교 앞에서 파는 맛탕을 좋아했는데 학교 앞 분식점 앞엔 커다란 스텐쟁반에 언제나 물엿이 가득했고 갓 튀긴 고구마를 그 물엿 바다에 몇 번 휘저어내고 나면 달달한 물엿을 가득 입은 고구마맛탕이 되었다.

단돈 300원이면 작은 종이컵 하나 가득 받아 집에 걸어오는 길 내내 오물거리며 먹었고  엄마는 학교 앞에서 사 먹는 모든 음식이 불량식품이라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손맛이 좋아 무슨 음식이든 척척 맛나게 해내던 엄마는 그 솜씨만큼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문제는 그 마법 같은 요리솜씨가 이상하게도 분식에서만큼은 발휘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것은 이미 내게 수차례 떡볶이나 떡꼬치 혹은 튀김등으로 증명된 바 있었다. 

그리고 맛탕은 엄연히 분식의 한 갈래를 담당했다.  

몇 번이나 말렸지만 엄마는 고집스럽게 그 맛탕요리를 완성했고 나는 엄마의 분식의 굴레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엄마는 "좋아하길래 기껏 해줬더니 안 먹는다"며 짜증을 내고는 한입 드시곤 멈칫했다. 분명히 그랬다. 엄마의 얼굴에 스쳐가던 당황스러운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말했듯이 우리 엄마는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고구마가 들어갔다는 것 외에는 맛탕과 어느 접점도 없던 그 이상한 정체의 음식을 두고 엄마는  "맛있네!!"라며 굳이 그걸 다 드시곤 결국 탈이 나셨더랬다. 그래도 끝끝내 맛탕 때문은 아니라고 하셨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엄마가 고집을 부릴 때면 그때 그 맛탕이 생각난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기억도 안 난다고 했지만 나는 그때의 그 당황스러웠던 표정을 기억한다.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


가족과의 행복한 삶을 위해 돈을 번다. 하지만 이내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버는 삶이 되어버린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돈이 있어야 행복한 거라고.

가족과의 화목한 삶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정작 가족에게 필요한 순간 나는 오히려 직장에 서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서운해한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희생하는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

무엇 때문에 일을 시작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나. 


내가 옳다고 맞다고 믿었던 것들.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보면 아닐 수도 있었다.

혹은 더 좋은 다른 방법도 있었다.

믿고 가져오던 것들이 지적당하거나 부정당했을 때  그것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공격하는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샌가 스스로도 의심이 들 때면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설득하기에 이른다. 내가 맞는다고. 

어리석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아집이었다.  

우습게도 이런 아집은 집단으로 있을 때에 더 견고해진다. 

집단지성은 집단 고집이 되어버린다. 같은 시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더 견고하게 한다. 


'이 사람도 나도 생각이 같은데 왜 너는 다르다고 말해? 나만 맞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다른 사람도 맞다잖아!' 


그러다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나듯 "아닐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온다. 

그렇지만 아무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그걸 들키는 순간 집단고집은 그들을 '배신자'라는 프레임에 가두기 때문이다. 






TV 드라마를 보면 정의로운 주인공도 똑똑한 빌런도 답답하기 그지없을 때가 있다. 

공포영화 주인공은 꼭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보이면 안 될 것이 보이는 곳에 홀린 듯이 걸어간다. 심지어는 극 중 누군가가 "저긴 절대 가면 안 돼요!" 하고 경고를 해도 간다. 

화면밖의 우리들은 "하지 마!! 가지 말라고!! " 하며 답답함에 가슴을 치지만 그건 우리가 화면밖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선이다.


가끔은 스스로도 한 발자국 물러나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항상 나만 옳은 건 아니라는 전제를 가지고 한 번쯤은 티브이 속의 주인공을 보듯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다면 서로의 의견을 좁힐 수 있는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해 가면서 늘 더 좋은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이유일테니. 

                     

작가의 이전글 쑥떡? 쑥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