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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ung Kim Apr 03. 2024

귀찮음을 이겨낸 맛의 승리

냄비밥의 매력

삶 속에서 늘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상황들이 번번이 일어난다.

습관적으로  '큰일 났다'라고 하지만, 말에 비해 실은 별일이 아닌 것들, 즉 시간(또는 노력)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잘 자잘한 일들이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우주의 모든 것은 엉망이 되고 망가지고, 또 아프고, 또 죽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압력밥솥이 고장이 났다.


A/S를 맡기면 되지만 당장 다음끼니가 코앞이라 별수 없이 알맞은 크기의 스테인리스 냄비에 밥을 지었다. 냄비밥이 처음이니 불 옆에서 떠나질 못했다. 우리 집 인덕션 기준, 중불(5단계)로 맞춰놓고 20분쯤 지나니 보글보글 밥물이 끓어오르는 게 보였다. 인덕션 세기를 3단계로 낮추고 10분 정도 뜸을 들이다, 2단계로 낮춰서 10분 더 있다 끄니 고슬고슬하게 밥이 잘됐다. 식구에 맞게 그릇에 다 퍼담고 나니 바닥에 눌은밥이 제법 있어서 누룽지를 눌였다. 잘 마른 누룽지를 식혀서 밀폐용지에 담아 냉동실로 보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도 깜짝 놀랐다. 사실 아이들이 너도 나도 왕왕대는 저녁 준비시간에 냄비밥을 안쳐놓고 한가로이 불을 지킬 수 없는 노릇이라 여간 불편하고 신경 쓰였지만 어쩐지 나는 이 냄비밥이 마음에 들었다. 압력밥솥의 편리함은 두말하면 입 아프지만, 그 편리함 때문에 갓 지은 밥을 먹을 기회를 종종 놓친다. 똑똑한 압력밥솥의 예약기능 덕분에 식사 때 맞춰 밥을  짓지만, (우리 집 기준) 통계적으로 압력 밥솥이 친절하게 '밥이 완성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갓 지어진 찰진 밥을 바로 먹는 날은 많지 않다. 보온기능을 믿고, 갓 지은 밥을 나중에 먹게 되는 압력밥솥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냄비밥은 식사시간대를 염두에 두고 밥을 짓기 시작해서 갓 지어 고슬고슬할 때 먹지 않으면 '식은 밥'을 먹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진짜 김이 모락모락 날 때' 첫 숟가락을 뜨게 된다. 누누이 말하지만 갓 지은 음식은 다 맛있다. 왠지 모르게 더 맛있으니, 많이 먹게 되고(요즘 계속 머슴밥 먹는 중) 하루를 위로받는 느낌이다.

주말에는 종종 영양밥을 하는데 몇 번 먹다 보니 아이들도 거부감 없이 무엇을 넣어도 그냥  잘 먹는다. 그 모습을 보며 갓 지은 따끈한 밥을 먹이는 것만으로 하루를 살아낸 가족들을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어 당분간은 귀찮음을 이겨내고 냄비밥을 할 생각이다.


냄비밥의 매력을 하나 더 꼽자면,
단연 누룽지다.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끓여 숭늉으로 마시거나, 바삭하게 눌인 누룽지를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여차하면 식사대용으로 후루룩 끓여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누룽지를 만들고 장렬하게 눌어버린 냄비바닥의 비주얼은 앞선 모든 맛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게 만든다.

잠깐 딴짓을 하다 불조절 타이밍을 놓치면 은빛 스테인리스 냄비바닥이 까맣게 울고 있다. 나도 울고 싶다.

그러나 진짜 울 필요는 없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참~ 쉬운 스테인리스냄비 '누런 때 제거' 방법이 친절하게 나와있다.


1. 냄비의 탄 부분까지 물을 채워주고, 베이킹소다  큰 술, 식초 세 큰 술을 넣고 끓인 다음, 부드러운 수세미로 닦아주면  감쪽같이 깨끗해진다.(베이킹소다(염기)와 식초(산)의 중화반응으로 생긴 거품이 찌든 때를 녹여내는 화학반응.)

⚠️단, 중화반응으로 인한 이산화탄소가스가 많이 발생하므로 실외에서 작업하거나 반드시 충분한 환기를 시켜야 한다)


2. 냄비를 물에 충분히 불려준 뒤, 탄부분에 베이킹파우더를 뿌린 다음 고무장갑을 끼고 살살 문질러주면 검게 그을린 때를 쉽게 벗겨낼 수 있다. (냄비 표면과 베이킹파우더의 입자의 물리적 마찰을 이용)

⚠️충분히 헹궈주고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다시 헹궈주는 작업을 서너 번 반복해야 한다.



압력밥솥이 고장 난 지 2주가 넘었지만, 아직 수리를 맡기지 않았다. 고장의 원인은 우리 윤제가 압력밥솥을 장난감처럼 열고 닫고 버튼을 누르고를 하루에도 수십 번 했기에,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은, 예고된  고장이었다.

위험하게 '왜 밥솥을 가지고 놀게 하냐'는 말은 마시길
불꽃같은 눈으로 안전하게 지켜보았으니.
그냥 고장 난 상태에서 가지고 놀라고 내어주니 마음이 편하다.


자투리 야채나 고기등을 넣어 영양밥을 지어먹기도한다.
당근과 초록완두콩으로 색감을 내보았다


덧붙이자면, 인터넷으로 예쁜 주물냄비를 봐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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