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벌써 14년 전, 남편과 둘이 이민가방 하나, 캐리어 두 개, 백팩 두 개- 신혼살림이라기에는 너무 단출한 기본적인 살림살이만 챙겨서 겁도 없이 독일유학 길에 올랐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도착한, 우리의 첫 보금자리,
빠르게 저물어가는 겨울의 햇살이 가득했던풀옵션 원룸(대략 7평 정도).
분명 이민가방 하나, 캐리어 두 개의 짐을 풀었는데어쩐 일인지 입주 전과 후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살림이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신혼의 재미로 없는 것 투성이지만, 부족한 줄 모르고(사실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닐까) 달그락달그락 몇 가지 식기로 소꿉장난하듯 살았던것 같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1년 만에 어렵게 보눙(wohnung:아파트)을 구해서이사라는 것을 했다. 풀옵션 원룸에서 나왔으니 가구도짐이랄 것도 없어서이사한 집의 방이며 거실, 주방이 휑하여 독일 특유의 고요함과 공기만이방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혼자 이사를 했던 남편의 말에 의하면, 천지창조의 첫째 날 같았다고 한다.(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천장에 달랑 전구 하나 있었다고)
주변에 살던 한인 교우가 귀국하면서쓸만한 가구들-침대프레임, 매트리스, 책장, 책꽂이, 식탁과 의자들-을 나눔 해준 덕분에 거실공간들을 어느 정도 채웠고, 자잘한 살림들은동네 플리마켓이 열릴 때마다 사다 채워 넣었다. 모아놓고 보니오합지졸같이 어수선했지만,오히려 개성 있고무엇보다 비로소 신혼살림을 장만한 것 같아당시에는 뿌듯했었다.
이제 주방이 문제.
요리는 잘 못해도 먹고살아야 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음식을 해야 하니, 주방살림이 꽤 필요했다. 그때즈음 독일에서한인교우 한 분이 돌아가셨고, 오랫동안 혼자 생활 하셨던 고인의 집과살림을 처분하는 일을 주변친한 지인 분들이 맡아해 주셨다. 어느 날, 한 지인께서 우리 부부에게 전화를 하셔서집에 와서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가져가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처음에는 그래도 되나, 망설였지만 기차 타고 조금 먼 거리였지만 일단은 찾아갔다.
정갈하게 놓인 물건들을 가만히 둘러보며 고인의 삶을 짐작해 보게 되고, 고인의 안녕을 빌며감사한 마음과 예를 갖추어 기도를 했다.
그녀만큼 오래되었을주방 식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보는 눈이 젬병이긴 하지만, 딱 봐도 고가의 식기들임을알 수 있었다.
탐나는 것들이 많았으나 집에 갈 길은 멀고, 나는 가슴에 아이를 안았고 기저귀 가방을 짊어져야 하니, 남편이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챙겨야 했다.
욕심을 내려놓고(사실 뭐에 쓰는지 몰라서 가져올 생각을 못했던 것들이 많았다. 지나 보니 꼭 필요한 것들이 더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고심 끝에 크림색넓은 파스타볼과찻잔, 커틀러리 세트를 챙겼다. 집에 누구를 초대했을 때, 적어도 8개는 있어야지 싶었는데 마침 개수도 딱이었다.
'식기들이 갖추어졌으니 이제 손님만 초대하면 되겠네!'
라며 속으로 어찌나 신이 났었는지.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다, 큰 곰솥도 필요하고, 요리에 따라 다양한 크기의 웍과 프라이팬도 필요하니 다 가져가라
한국을 떠나오기 전, 양가어른들이 이것저것 챙겨주신던 주방용품들을 모두 마다하고(와, 진짜 철없다),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건 제일 작은 사이즈의 편수 냄비, 프라이팬이 전부였다. 철부지는 뒤늦게서야 후회했다.
막상 사려고 보니, 제대로 갖추려면 한 달은 꼬박 굶어야 할 것 같은 가격에새것은 엄두도 못 내고 괜찮은 물건을 찾아 매주 벼룩시장을드나들었다. 사람마음이 간사한 것이
요리는 못해도 기름때 덕지덕지하고 다 벗겨진 냄비에 국을 끓이고 싶지는 않더라.
그리하여 여기저기 소문을 듣고, 기차 타고 다른 동네에서 열리는 규모가 큰 벼룩시장에 가서, 그나마 쓸 만한, 마음에 드는 냄비와 프라이팬을(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중고로 얻은 아이의 유모차에 실어서 돌아왔다. 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는 생각에눈물이 핑 돌았다.
스티커 쿠폰으로 구입한 내 첫 살림
우리가 살던 동네에 큰 마트들이 4~5개 있었는데, Rewe라는 독일 마트에서 물건 5유로 이상사면 스티커를 한 장씩 주는데, 어느 날 보니, 쿠폰에 스티커 30장을 모으면 wmf 냄비며 프라이팬, 커틀러리등이 60% 이상 할인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일 5유로씩 장을 봐도 쿠폰 하나 모으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행사기간이 내가 쿠폰을 다 모으기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 그저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렇게 낙심하고 새 주방용품은 포기한 채,마트에서스티커 한 장만큼의 장을 보고 계산대에서 기다리는데, 앞서 계산한 독일 아주머니가 직원이 내미는 스티커를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 차례가 되어, 떠듬떠듬 또박또박 천천히 직원에게 말했다.(독일마트 직원 중에 내가 하는 독일어를 단 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Kann ich (diesen) Sticker nehmen?
-이 스티커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마트 직원은 내 손 끝에 놓인 스티커들을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내 몫의 스티거도 건네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스티커 모으기.
의외로 사람들이 가져가지 않는 스티커들이 꽤 많아서 나는 마트 직원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가며 금세 쿠폰 한 장을 채울 수 있었고, 그렇게 두 장, 세 장을 모아 냄비 세트를 구입했다.
WMF 구르메 플러스 시리즈/이미지출처 was.wmf.co.kr
정확히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세 가지 사이즈 양수냄비 세트를 60유로 정도 주고 구입했으니 (made in Bangladesh 혹은 China 아니고, made in Germany)나로서는 득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새 곰솥냄비에 돼지고기 수육을 가득 삶아 도움을 받았던 친구들을 초대하여 잘 갖춰진 식기에 담아 대접하고 찻잔에 차를 내어 후식도 내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이후 다른 마트(Tengelman)에서 쌍둥이칼로 유명한 브랜드의 칼, 가위가 행사가 나왔고, 또 열심히 남들이 가져가지 않는 스티커를 살뜰하게 모아서 주방 필수품을 장만하고, 한국에 방문할 때 가족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사실 매달 월세내고 먹고사는 것만으로 빠듯했던 유학생 신분으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고가의 명품 브랜드의 주방용품을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귀동냥하고, 모르면 어버버 하더라도 물어보고, 그것도 안되면 백 번 망설이더라도 현지 주민이나 독일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이 있다면 내가 나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알았던, 14년 전 무모했던 독일 유학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실수하면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거절당해도 다른 방법을 찾고, 방법을 찾기 위해 도움 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철부지의 젊어서 사서 고생이 유종의 미를 거둔 셈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 샀던 냄비세트와 주방용품들을 사용하고 있다. 사용감이 꽤 있지만 사용할수록 손에 익어서 그런지 쉽게 버리지 못하여 여태 가지고 있다. 물론 상태도 아주 양호하다.
철부지의 패기로 빈손으로 시작했던 신혼살이 시절, 다람쥐처럼 부지런히 발품 팔고 여기저기 귀동냥에 반문맹이었지만 열심히 나불대며 살았던, 그 시절이 묻어난 나의 역사이자 추억이니, 아무래도 버리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