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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 강 Dec 01. 2023

[에세이 #4] 도마와 이토가 살았던 기울어진 운동장

김훈 '하얼빈'을 읽고 

  도마와 이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논픽션 같은 픽션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작가의 감정적 이입보다는 당시 상황상황에서 느꼈을 두사람의 심리적인 무게가 흐름을 주도해 간다. 그 흐름에 의식을 맡긴채 문득문득 생각나는 생각의 꼬리들을 붙잡아 보았다.     

  첫 번째, 도마의 이토처형에 대한 결심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자식에 대한 사랑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있다면 그 크기는 얼마나 될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도마가 상해에서 돌아왔을 때 느꼈을 자식에 대한 낯설음,그리고 옥중에서 전해들은 보지도 못한 셋째아들 소식,같은 시대를 살았던 저항문학가 이육사선생님도 옥중에 있는 동안 첫째 자식을 병으로 잃었고 보지도 못한 둘째아이를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고 결국 옥사했다. 많은 무명의 독립투사들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식에 대한 안위보다도 자신의 목숨 값으로 운동장이 평평하게 대한제국의 것으로 원상복구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 분 들은 아마도 바뀌어갈 세상을 위해 던져질 물수제비가 되려고 한 것일 게다. 거사를 하는 그 순간까지 도마의 고민은 드러나지 않고 작가의 펜 속에 처절하게 배여있는 듯하다.   


  두 번째, 도마의 정치적 의도는 성공하였을까?

도마는 개인적으로 생명을 가진 인간을 살해한 살인자로서 하느님과 이토의 유족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그렇다면 그 거사는 한국 의병 참모장으로서 대한제국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이며,동양평화를 위해 행사한 마땅한 일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한 도마의 목적은 달성이 되었을까? 의병참모장이라고는 하였지만 도마의 이토처형은 공식적인 조직의 의사결정이 아닌 개인의 결단에 의한 거사로 보인다. 그렇기에 당시 일본은 처형행위의 정치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개인의 폭력적 일탈로 폄하하지 않았던가.대한제국의 백성에게는 義士임이 분명하나 일본인에게는 민족의 원흉이었을 것이며,일본의 언론플레이에 제3국 사람의 눈으로는 그 용기의 가상함에도 테러리스트로 규정했을지 모를 일이다. 당시의 조선땅에서 빅마우스 역할을 했던 성직자들의 입으로 도마의 거사를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규정하였다면 충분히 유추 가능한 해석이다. 그래서 절반의 성공이다.  

     

  세 번째, 청소년이었던 도마는 왜 동학군과 맞서 싸웠을까?

역사서를 통해서나 영화,뮤지컬 등을 통해서 다양하게 도마의 생을 접하였지만 동학군과 맞서 싸운 일화는 낯설었다.중요한 사실이 아니라는 작가들의 판단일 수도 있고 자료가 부족해서 굳이 언급을 안했을 수 도 있지만 사실이라면 도마의 사상적배경을 살펴보는 데에 변수임은 분명하다.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동학혁명은 아시다시피 녹두장군 전봉준이 뇌리에 박혀있을 만큼 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백성들의 혁명적 시도였으며 외세에 대한 저항이었다.결국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작전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이러니하다.이러한 세상의 소용돌이속에 도마가 있었다. 당시 동학군은 처음에는 탐관오리제거와 민씨정권타도에서 점차 봉건제도폐지와 친일정권의 타도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따라서 동학군의 맞은편엔 대지주와 보수유생이 있었다.황해도 대주주집안이었던 도마의 집안은 동학군이 목표한 주적군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도마는 사상적대립이나 대의를 떠나 집안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을 가능성이 높다. 도마와 동학군은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 모순이 있었던 것일까? 좀 더 논쟁이 필요한 부분이나 잠시 보류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도마는 지금 최고의 독립운동가반열에 있으며 동학혁명은 2023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으니 논쟁의 물꼬를 잘 못 트면 양쪽에서 역적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네 번째, 당시 가톨릭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가톨릭은 작가와도 관련이 있는 종교이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많은 순교자를 발생하며 힘겹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조심하고 있는 상황적 여건은 이해하더라도 불교,천도교 등과 달리 애써 식민지조선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당시 가톨릭의 처세는 인정할 수 힘들다. 마치 가톨릭의 리더십이 서양사제중심으로 교회를 지키고 보호해야한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톨릭은 서학으로 들어와 사농공상,양반과 노비라는 전근대성을 혁파하며 세상속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가장 역할이 필요한 상황에서 가톨릭이 보여준 그들의 침묵은 당시 일본통감부에게 명분을 실어주었을 것이며 점령국에 대한 무력저항을 한낱 테러리즘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일본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후일 가톨릭에서 이에 대한 반성과 도마에 대한 복권이 있었지만 그 반성은 계속되어야 한다. 종교는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백성의 편에서 그들의 빛일때만 자유롭다.     

 도마의 대한제국을 위한 순교 그리고 이루 헤아리지 못할 독립투사들의 죽음, 그렇게 해서 맞이한 해방은 그 분들의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릴 만큼 정말 값어치 있었을까? 작가는 이에 대한 해석을 언급하지 않았다.

해방은 우리의 자력보다는 미국의 원폭투하때문이었고 새롭게 탄생해야할 운동장은 대한민국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 쪼개서 두 개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평평한 운동장이 아닌 봉건의 잔재,일본의 잔재 등이 주도한 기울어진 운동장의 탄생이었다. 이 운동장에서 우리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여전히 또 다른 물수제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다음 의문을 던지며 붙잡던 생각의 꼬리를 놓아 볼까 한다. 조선 순종때 벌써 기차는 서울역에서 지금도 지명이 있는 성환역을 거쳐 부산역에 이르는 경부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왜 상행궤도는 왼쪽에 있고 하행궤도는 오른쪽에 있을까? 처음에 일본이 아닌 조선이 철도건설을 주도했다면 방향이 바뀌지 않았을까? 좌측통행을 하다가 2010년부터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알지만 왜 그랬는지는 의문을 갖진 않는다. 1945년 해방 이후로 한번도 일본이 정해놓은 좌측통행에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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