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레니스! -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 베레니스! - 그 소리에 잿빛의 폐허 같은 기억으로부터 수천 개의 인상이 격동적으로 뒤흔들린다.
- 베레니스, 에드거 앨런 포 中
삶 속에는 지극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만남이 있다.
처음으로 그 목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그 눈을 마주하면,
마치 에드거 앨런 포가 그의 소설 '베레니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그 찰나는 무의식 속 잿빛에 가려져 있던 수천 가지 장면들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듯하다.
왜 어떤 만남은 다른 만남보다 더 진한 것일까?
불교를 비롯한 몇몇 종교는 이러한 현상을 전생, 또는 윤회 Reincarnation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옷감이 바뀌고, 화폐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는 와중에
다시, 또다시 마주하는 영혼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둔다; 그 열매는 씨앗과 같은 본질을 가진다.
- 인도경전 마하바라타, xii. 291.22
윤회는 카르마 Karma 즉, 인과법칙을 기반으로 한다.
죽음 이후에 육체는 썩어 문드러질지 몰라도 영혼은 그대로 남아 삶의 대가를 마주한다고 한다.
살아가며 발생시킨 영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영혼은 다른 육체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윤회는 이러한 에너지적 불균형을 해소할 기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역지사지로 하여금 진실된 사랑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배움의 장치다.
카르마 법칙의 실질적인 작용은 요가 철학 용어인 삼스카라 Samskara로 설명할 수 있다.
삼스카라는 잠재의식에 각인된 인상으로써 삶 속 모든 상황과 개인의 성격적, 행동적 경향을 형성한다.
그러니까 전생으로부터 무의식에 남겨진 흔적이 현생의 나의 모습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전생에 차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면 그 반복적인 행위와 선호가 무의식에 각인되고,
무의식 속 선호가 현생에서 그대로 발현되어 현생에서도 차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회 사상은 삶 속 여러 상황에 대하여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이다.
살아가며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을 전생을 통해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윤회 이론에 따르면 수없이 많았을 이전의 삶이 나의 현재를 건설하였다.
각각의 삶에서 '나'라는 주체가 방사한 에너지가 실타래처럼 뻗어 나와서 직물이 짜이듯이 어떠한 에너지적 패턴을 만들었고, 그 에너지 패턴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에 발현되어 바로 지금 어딘가에 앉아 컴퓨터에 글을 쓰고 있는 존재를 탄생시킨 것이다.
카르마는 제 도리를 다하여 각본을 만들었고 나는 그 주어진 연극 속 주연 배우로서 삶을 살아간다.
우리 모두 매 순간 전생의 카르마를 겪고 살아내고 있는 것이며, 삶 자체가 카르마의 풀어냄인 것이다.
차 한 잔에 담긴 물을 바라본다.
지나간 모든 세월의 애절함을 담기에는 현재의 그릇이 너무나 작게 느껴져,
그리고 지나간 모든 세월이 담겨진 현재의 그릇의 광활함에 압도되어,
말없이 빈 찻 잔 안으로 눈꺼풀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