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먹어 간다는 것(feat. 딸랑구는 오랜만에 치마를 입었다)
딸랑구님은 치마를 별로 안 좋아한다 아니 안 좋아하셨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음날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따님이 입을 연다
"아빠 저 치마 입고 학교 가고 싶어요."
"어? 어쩐 일이야 치마 좀 입어보라 그래도 잘 안 입더니."
"아빠가 사준 거 내일은 입고 갈래요."
명절에나 되서야 긴 한복치마나 겨우 입던 아이였다 그간 딸랑구를 키우면서 느꼈던 옷 입혀보는 재미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속옷이 보이지 말라고 사준 속바지도 챙겨준다 속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줬다 아이들 치마 중엔 짧은 것도 있다 보니 조심은 해야지 아이가 날씬한 편이다 보니 옷이 웬만하면 다 잘 어울린다 살이 쪄가는 아빠는 그저 부러울 뿐이고
이제 슬슬 자기만의 패션 자아가 생기는 것 같다 그동안은 내가 사주는 것 위주였고 거기에 딸랑구의 의견이 한 스푼이었다면 요즘은 본인 의견에 아빠 의견 한 스푼정도이다 아마도 아이가 더 커가면서 나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거울로 돌아 내 얼굴을 한번 봐본다 이제는 흰머리가 한가닥 두 가닥씩 생긴다 그게 참 낯설다 결혼했을 때부터 이혼하고 마무리가 되어 지금까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거울 속에 나는 나이 들어가고 있다 멋지고 중후하게 늙어 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궁상맞게 그리고 억척스럽게 늙어가고 있다 생각대로 되지 않은 샘이다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은 오늘이라는데 나는 내일을 돌파할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버티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앞날에 조금이라도 솟아날 구멍이 보이길 바라지만 그건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한 번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리기 쉽지 않은 세상인데 나는 벌써 몇 번이나 넘어졌다 그래서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치도 많이 줄어들었다
막연한 잘될 거야 보단 뭐라도 하나 더 배우고 해 봤던 시절이 있었다 근대 그것도 요즘은 힘들다 배우려는 시간보다 혼자 가정을 꾸리고 바깥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아이가 좀 더 커서 아빠의 손이 덜 가게 되면 그때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거울에서 보이는 흰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자 공주가 나선다
"아빠 흰머리 내가 뽑아줄게요."
"뽑을 수 있겠어요? 힘 많이 필요한데 집에 족집게가 있나?"
"찾아볼게요."
잡동사니 모아두는 바구니에서 아이가 족집게를 찾아왔다
"검은 머리 뽑으면 칭찬스티커 한 장 뺐을 거예요."
"안돼요."
"그럼 잘 뽑아주세요, 흰머리 나는 것도 서러운데 검은 머리 뽑으면 안 되지."
아이는 깔깔거리며 내 머릿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웃는 모습이 그래도 마음을 따듯하게 채운다 많이 바라지 않기로 하자, 오늘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행복한 하루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그렇게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