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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Nov 01. 2023

프루티

생존일지

1

잔잔하게 추락한다는 말은 쓰기가 싫다. 이제는 익숙한 언어도, 동어반복도 사절이다.
흐린 시야, 몽롱한 눈 밖의 풍경, 먼지가 쌓인 찻주전자.
닫히지 않은 문, 난해한 시, 일부러 어렵게 만든 것 같다는 행,
엎지른 물감, 검정색으로 물든 파스텔.
잠을 자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 감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들게 번 돈을 먹는 데 투자하면 기분이 좋아지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여전히 가라앉고 있다.
이제는 이 느낌이 두렵다.



2

폐쇄된 나의 기도.



3

어젯밤 먹은 젤리에서는 과일 향이 났어. 늘 그랬잖아. 삶은 과일 향이라고. 죽어갈 때면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치우고 말랑말랑한 과일을 겨우 집어넣었지. 과일이 나의 유일한 밥이었어.
나의 폐에는 여전히 물이 들어차고 있어.



4

무엇을 위해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지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쓰는 일이며, 마음껏 타자를 치는 일이다. 이제는 화려한 글을 쓰지 못해도 좋다. 아니, 진심은 아닌 것 같다. 내 마음이 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음이 가는 그대로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내 생각보다 글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가끔은 미쳐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올해 A4 300장만큼의 글을 썼다. 9월까지 쓴 글을 셌을 때 그랬으니, 지금은 몇 장인지 가늠되지 않는다. 올해는 신기한 일이 많았다. 사실 살아있는 것조차 기껍다. 아직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고 여전히 나는 가라앉고 있다. 이따금 기도는 폐쇄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세상은 역류한다. 꼭 원래부터 세상이 뒤집혀 있던 것처럼 중력을 뚫고 올라오는 나의 위산.



5

올해는 유독 이상한 일이 많았다. 아니, 애초에 작년을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작년 유월부터 올해 삼월까지는 기억이 잘 없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정신이 나간 상태로 살았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힘들다.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왔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로 힘들다. 빡빡한 일정을 버텨내는 일도, 몸을 갈아가며 사는 것도, 잠을 줄이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잠이 오지 않는 것도, 불면의 밤에 시달리는 일도 전부 다 힘들다.
최근에 썼던 소설 중 <길을 잃은 사람들>의 다른 버전으로 결말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그렇게 꿈결 같지 않은데. 이렇게 이상적인 관계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당장 내가 숨 쉬며 이 땅에 살아있는데.
다음 소설은 <길을 잃은 사람들> 리메이크다. 스물의 어리숙함을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6

어린 날의 존경은 쉽다. 어리숙한 날의 존경은, 아주 가벼운 존경이다. 사람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아주 딱딱한 존경.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며 유연한 존경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보냈던 존경은 아주 납작한 존경이었던 것이다. 존경과 사랑 그 어디쯤에 있던 감정으로 나는 일 년을 망쳤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돈 때문에, 또는 내가 헤픈 사람이 아니라서 그냥 날 차단했다. 모든 말이 거짓이었을까. 왜 구월까지 내 메일을 읽었지. 왜 내게 미쳤다고 말한 걸까.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은 그 일은 금지어다. 내 앞에서 선뜻 그 일을 꺼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가 사실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껍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숨을 쉬며 살아있을 줄 몰랐다.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껍다.
앞으로는 사제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다. 내게 있어 존경하는 선생님은 고등학교에서 끝났다. 강사와 생활 담당 그 어디쯤의 사람들이 재수 시절의 나와 2022년도의 나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선생님이 아니었다고.



7

삶은 과일향이야. 그야 목이 엉킬 때마다 과일을 집어넣어 삶을 살아냈으니까 그렇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은 너무나도 깊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대장의 노래를 들어. 나도 누군가의 대장이었고 이제 나는 대장이 아니지만 내게도 대장이 생겼어.
어떤 운명이 생긴다면, 그래서 내가 운명을 밤새 기다린다면 그것은 아주 조용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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