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 천치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밀의 인용구를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소크라테스가 될 때에야 밀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본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고,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은 개인의 생각이다.
사실 나는 행복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부터―이 글은 서로에게 글의 주제를 설정해주는 글쓰기다― 주제를 선정해주신 분이 아주 예리하시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나는 행복에 대해 글을 잘 쓰지 않는다. 대부분이 우울을 풀어낸 글이며, 때때로 삶이 아닌 글에 화풀이를 할 때도 있다. 어쩌면 선천적인 질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질병은 치료를 통해 고쳐져야 마땅하며 나는 이번 주제를 치료로 삼아 행복을 담은 글쓰기도 시도해보려 한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들이 많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의 선물 상자라든가, 어린이날에 놀이공원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 등등 행복은 일상 가까이에서 발견되고 형성된다. 그러나 나는 앞서 언급한 행복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우리 집은 내가 여섯 살이던 해 이후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지 않았고―기껏해야 딱 한 번 만들어봤다― 그 아래 선물 상자도 놓은 적이 없었다. 어린이날에 놀이공원을 갔던 기억은 있는 듯하다. 아마도 서울랜드였다. 그리고 모든 시절을 건너뛰어 사춘기 시절의 나의 행복을 찾아보자면 단연코 운동이었다. 지금은 빌어먹을 고관절이 희생당해 걸을 때마다 고통을 겪고 있지만 부상을 당해도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며 뛰어놀던 나는 행복했다. 어쩌면 그건 축복이었다. 그러니 행복과 축복은 동일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플로어볼이라는 운동을 했다. 생소한 운동이다. 나도 학교 체육시간에 처음 배웠다. 무슨 운동인지 감이 잘 오지 않으시는 분들은 실내 하키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출전 선수는 한 팀에 여섯 명이며 골키퍼까지 포함된 명수다. 나는 주로 공격수였다. 가끔 미드필더를 맡았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학교 팀에 일 년 늦게 들어왔기에 주로 공격수 자리에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큰 것도 같지만 어찌 됐든 가끔 연습을 빼먹고 늦잠을 쿨쿨 자던 나는 지금 그때의 시절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그게 바로 나의 축복이고 행복이다.
정말 행복과 축복은 동의어일까? 아직까지 나는 행복의 동의어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축복이 내려진 뒤 언제나 행복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둘은 분명한 상관관계가 존재할 것이다. 그게 나의 예상이자, 행복을 떠올리면 운동과 운동이 나의 삶에 뿌려 놓고 간 축복을 생각하게 되는 나의 정의다. (어디까지나 행복에 대한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