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과 떠난 유럽 배낭여행 -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숙소를 등진 사람들은 무사히 바티칸에 갔을까? 하여, 교황님을 보았을까?? 로마에서 의미 없이 축성된 성당이 어딨겠냐만, 규모면에서나 관심면에서나 성 베드로 성당만큼은 아니라 해도 분명한 건, 산타마리아 마조레(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성당은 스쳐 지나갈 곳은 아니라는 것. 한데 모인 저들은 가톨릭 신자인가? 아니면 단지 나와 같은 생각인가?? 복장을 갖춘 자는 성당 입구를 통하여 속속들이 들어갔지만, 훤히 맨살을 드러낸 자는 건네받은 비닐 천으로 팔과 다리를 꽁꽁 싸맨 후에야 입장이 가능했다.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빈자리는 고사하고 간신히 설 자리를 할당받았다. 엄청난 규모의 성당 내부를 돌아보는 시선에 어린 복사를 선두에 세운 성직자의 열이 이어졌고, 이내 향 냄새가 성당 안을 잠식했다. 해석은 불가능했으나 굳이 유추해 본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시작되는 일주일의 삶에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 가장 높은 에스퀼리노 언덕에 세워진, 하늘과 가장 근접한 성당은 로마 내, 성모마리아에게 헌정된 스물여섯 개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규모 또한 크기에 'Maggiore'라 이름 붙였다 했다. 75m에 달하는 대성당의 종탑은 중세 시대 로마에서 가장 높아 종탑에 올라가면 시내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고,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의 구유 일부를 얻은 후에 '구유의 성모 마리아'라 불렸으며, 1348년에 지진으로 큰 손상을 입었지만 오랜 기간 복원하고 보수하여 원상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아 일반 성당보다 격이 높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대성당, 그리고 산 사울로 푸오라 레 무라 대성당과 함께 바티칸의 교회이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금으로 도금된 천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을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바쳤고, 여왕은 수중의 금을 스페인 출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위 기간 1492-1503)에게 봉헌했다. 이에 1489년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에 의해 완성된 천장 중앙에는 알렉산데르 6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중앙 통로를 기준으로 양편의 벽을 따라 이어진 모자이크는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의 이야기이다. 중앙 제대 아래는 '예수 탄생 지하 예배당'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말구유의 나무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 성당 내부 발다키노의 오른쪽 측랑에는 바로크 시대의 거장 Gian Lorenzo Bernini를 포함한 그의 가족 무덤이 있다. 'Gian Lorenzo Bernini 1598-1680'라 새겨진 네모난 석판은 그의 명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초라했지만, 평소 그가 바랬던 대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내 부친의 곁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성당의 외적인 면을 둘러보아서일까? 내적 본질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하여, 책을 들춰보았더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8월, 한여름에 이례적으로 눈이 내렸다. 그 기적은 다름 아닌 교황 리베리우스(재위 기간 352-366)의 꿈에서였다. 꿈속에서 성모마리아는 하얗게 눈이 쌓인 곳에 교회를 지으라 계시한다. 또한 아이가 없어 걱정하던 로마의 귀족 지오반니 파트리지오 부부의 꿈에서도 성모마리아의 계시는 이어졌다.
"눈이 내리는 곳에 교회를 지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이에 지오반니 부부는 리베리우스 교황과 함께 눈이 내린 곳을 찾았고, 에스퀼리노 언덕,, 산타마리아 마조레(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즉, '눈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356년 지어졌다. 현재의 성당은 교황 첼레스티노 1세(재위 기간 422-432) 때 건축을 시작해, 교황 식스토 3세(재위 기간 432-440)가 434년 8월 5일에 축성했다. 이에 가톨릭인들은 '눈의 성모'라는 칭호를 얻은 성모마리아에게 봉헌하였으며, 교황의 대성당인 이곳에선 매년 성모 승천 대축일(8월 5일)에 교황께서 직접 미사를 집전한다. 예배 도중 돔에 달려 있는 등불에서 장미꽃잎이 흩날리는데, 이는 성모마리아의 전설을 상징하는 행사이다.'
하여, '지오반니 부부의 소원은 이뤄졌을까?' 다시금 궁금해졌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신자든 아니든 간에 '눈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다. 그 옛날 지오반니 부부의 간구에 귀 기울였던 것처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그날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아픔을 어루만지고 피폐한 영혼을 보듬고 있었다. 단언컨대, 신성하면서도 존귀한 업적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행하여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노라.
일요일에 짜장라면을 먹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라면, 콜로세움- 베네치아 공국으로 이어지는 차도가 보행자 전용 거리로 변모하는 것이 일요일 로마의 현주소다. 네 바퀴의 자동차 아닌 2족 보행하는 사람들로 인해 당황스러운 걸까? 생경스러운 기운을 여과 없이 토해낸 도로는 한껏 달궈져 있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열정까지는 막지 못했다. 화려한 색으로 제 얼굴을 물들인 이, 목소리로 귀를 잡아채는 이, 빛바랜 물건으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 이, 현란한 몸사위로 시선을 끌어당기는 이까지,, 분명 주인공과 관객으로 분리되었음에도, 한데 얽힌 그들은 쉬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일요일의 로마를, 그 찰나의 순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관객에 호응에 힘을 얻은 무희의 몸사위가 정점을 향해 치닫자, 이에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거세졌다. 빙그르르- 도는 무희를 따라 로마 속으로 시나브로 빨려 들어간다.
목적지는 판테온이었다. 트레비 분수에서 출발함과 동시에 '판테온' 세 글자만 줄곧 되뇌었다. 좁다란 골목길엔 시선을 잡는 무엇 하나가 없기에 앞만 보고 발을 재게 놀렸으나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의도치 않게 멈춰 섰다. 누구의 잘못인지 판단하긴 어려웠다. 하여, 별일 아니라는 시선으로 바라다본 그의 손엔 조각 피자가 들려 있었다. 이에 고개를 돌린 곳엔 간판이라 칭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작은 목판이 걸려 있었고, 글인 듯도 그림인 듯도 한 나열의 조합은 현지인이나 알 법했다. 들여다본 실내는 비좁은 데다 어두웠다. 이런 곳에서 피자를 판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반백의 노인들은 피자를 만들었고 심지어 팔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합을 맞춘 듯한 부부로 추정되는 그들은 외모와는 달리 손동작은 민첩했다. 할아버지는 제조를 담당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피자를 진열하고 판매하는 것은 할머니의 몫이었다. 속는 셈 치고 집어든 조각 피자는 나쁘지 않았다. 토마토소스, 주키니 호박 거기에 치즈가 다였지만, 베이스 격인 토마토소스는 과하지 않았고, 토핑 격인 치즈는 본연의 맛에 충실했다. 하여, 켜켜이 놓인 주키니 호박을 돋보이게 했으며, 담백하고 고소함이 일품이었다. 에스프레소가 훌륭하면 베리에이션은 단연 옳다. 요는, 베이스가 훌륭하면 오케이란 말이다. 내 비록 먹은 것이 호박 피자뿐이었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로마 재방문에 괜스레 들뜬 이유는 이 때문이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위치라도 적어둘 것을.. 삼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헤매지 않으려 출발점은 전과 같이 트레비 분수로 정했다. 줄곧 앞으로 나아가 Via del Corso를 가로질렀다. Via di Pietra를 따라 곧장 나아가 하드리안 신전을 지나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제 판테온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시선을 왼쪽으로 두고 천천히 살폈으나 타짜도르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았다. 하여, 놓친 것이라 여겨 이에 역으로 훑어 나갔지만 그럼에도 없었다. 가게 위치는 정확하지 않았어도 분명한 건, 도착점을 판테온으로 두면 좁다란 골목의 왼쪽에 위치에 있었다. 몸을 틀어 판테온을 향해 다시금 나아갔다. 기념품 가게를 지났다. 그리고 출입문이 닫힌 가게를 지나쳤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니 다시금 타짜도르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골목 중간에 피자집이 있긴 했지만 기억과는 상이한 그곳에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헤매는 나를 뒤로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오빠의 손짓이 분주했다. 이내 따라 들어가니 이곳 역시 호박피자를 팔고 있었다. 건물의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는 사뭇 달랐으나 기억 속의 피자와는 제법 비슷한 모양새였다. 늙은 호박이 멋진 마차로 변하는 동화 속 마법처럼, 어둡고 비좁던 가게는 세련되게 변모해 있었다. 입 안에 퍼지는 그 맛이 훌륭하기 그지없었음에도 환한 웃음을 짓는 직원과, 가지런한 모양을 자랑하는 피자보다는,, 노부부의 사람 좋은 미소가, 그들이 빚어낸 투박한 피자가 새삼 그리웠다. 아쉬워하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통통한 몸집 자랑하는 새우가 올려진 조각 피자를 게눈 감추듯 해치운 오빠는 엄지를 들어 올린다. 그래요. 네가 웃으면 나도 웃어야지요.
"시원스레 비가 내려야, 아~ 내가 속았구나 할 텐데.."
맑은 날의 판테온이 궁금하다며 나보나 광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 오빠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의 오쿨루스를 통해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엿볼 수 있어, 이를 놓칠세라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쁜 사람들을 휘돌아보며 오빠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마음을 곱게 쓰세요. 아저씨.. 막상 이리 뱉었지만 오빠의 심술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잔웃음을 누르며 판테온을 나오는데 구슬픈 가락이 귀를 잡아챘다. Fontana del Pantheon과 인근 레스토랑의 경계선 격인 빈 공간에선 어린 소년이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도록 친구들과 뛰어놀아야 할 소년의 얼굴엔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 아닌 삶에 찌든 그늘이 가득했다. 지극히 구슬프고 애처로운 선율을 연주하는 주체가 아이여서는 안 되었다. 혹 앵벌이는 아닌가 싶어 감시하는 포주를 찾으려 두 눈을 열심히 돌려 보았지만 색출에는 실패했다. 순간, '올리버 트위스트'가 떠올랐다. 현재의 삶은 어둠일지언정 더는 타락하지 않기를, 그리고 머지않아 따듯한 빛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되지도 않는 오지랖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소년을 후리는 포주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나 역시 결국, 같은 어른이니..
Chiesa di Nostra Signora del Sacro Cuore(성심 성모 교회)를 끼고 나보나 광장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골목에는 벌써부터 들뜬 기운이 가득했다. 골목의 끝이자 광장의 시작점인 곳에 잠시 멈춰 서서 앞 그리고 뒤를 번갈아 살핀 후에 광장을 향해 크게 발을 떼었다. 보통의 유럽의 밤 풍경과는 달리 나보나 광장은 늦은 시간까지 밝혀, 멋과 맛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삼은 불나방들은 찬란한 빛을 따라 모여든다. 그러나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기엔 광장이 품고 있는 본질은 실로 컸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결 구도는 늘 있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그러했듯, 바로크 시대에는 조각가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조각가 아버지를 둔 베르니니와 석공 아버지를 둔 보로미니의 시작은 닮은 꼴이었다. 그러나 물려받은 재능은 닮았다 해도 타고난 배경은 판이하게 달랐다. 베르니니는 나폴리 화가 카발리에르 다르피노(Cavalier d'Arpino)가 보르게세 가문에 써 준 소개장을 손에 쥔 아버지를 따라 나폴리를 떠나고, 어려서부터 돌과 친숙했던 보로미니는 밀라노에서 석공 기술을 공부한 후에 홀연단신 고향을 등진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향한 곳은 로마였다. 로마에 입성한 베르니니는 쉬피오네 보르게세(scipione borghese)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그는 보르게세 갤러리를 장식할 작품을 주문했고, 이에 베르니니는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론과 다프네>, <다비드> 등을 연달아 선보이며 추기경은 물론 여타 후원자들의 기대를 넘어 자신의 예술적 명성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를 맡길 생각을 품었을 정도로 베르니니의 능력을 높이 샀던 당시 피렌체 추기경이던 마페오 바르베리니가 1623년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자 그의 지위 또한 덩달아 상승하여 교황청의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1629년 교황청의 수석 조각가 카를로 마데르나가 불의의 낙상 사고로 사망하자 수많은 예술가들 중 베르니니가 그 직위를 물려받게 된다.
한편, 보로미니는 바로크 건축의 거장이며 교황청의 수석 조각가였던 카를로 마데르나에 의해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 궁의 확장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1621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8년 후 베르니니가 궁전 건축에 참여하며 두 사람의 만남은 성사되었고, 베르니니의 주도 아래 두 사람은 많은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던 중, 불화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 작업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애당초 작업의 적임자로 보로미니가 거론되었으나 교황의 친구라는 이유로 베르니니가 내정되었다 한다. 그럼에도 보로미니는 작업에 최선을 다했지만, 과정은 상관없다는 듯 모든 공과 보수는 베르니니에게 돌아가고, 정작 자신은 등한시되자, 이로써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은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우르바노 8세가 권좌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베르니니에게 더 이상의 꽃길은 허락지 않았다. 교황에 오른 인노첸시오 10세는 우르바노 8세와는 달리 성 베드로 성당의 종탑 건설 후 성당 벽면에 금이 간 것을 문제 삼았고, 이때다 싶은 보로미니는 바티칸 지역 지반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다소 두꺼운 종탑을 세운 것은 성당 붕괴의 초래를 방관한 격이라는 의견을 내세워 베르니니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당시 조사 위원회의 입장 역시 베르니니의 편은 아니었다.
'이 사태의 책임이 베르니니에게 있지 않지만, 그에게 공사 철거를 명한다.'
잘못이 있다면, 애당초 설계를 한 카를로 마데르나에게 있었다. 하여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했지만, 망자에게 죄를 따져 물을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베르니니가 조사 위원회의 결정에 순응하여 11개월에 걸쳐 철거 공사를 진행함에 따라 더 이상의 시시비비는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으며, 이로써 보로미니와도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평생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나보나 광장에서 조우하게 된다. 인노첸시오 10세는 나보나 광장에 자신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황이 되자 이곳을 영광스러운 본거지로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고, 그 기념비적인 첫 사업이 바로 분수 건설이었다. '인류 발상지를 흐르는 4대 강의 분수를 세우자'는 아이디어는 보로미니의 머릿속에서 나왔지만, 현상 공모를 통해 채택된 디자인은 베르니니의 것이었다.
보로미니의 디자인이 채택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노첸시오 10세가 내민 화해의 손길이라 입을 모았지만, 정작 그는 인정(人情) 아닌 베르니니의 디자인에 매료되었다 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베르니니는 디자인을 제출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 보로미니의 디자인을 탐탁지 않아 하는 인노첸시오 10세의 의중을 알아챈 베르니니의 후원자가 교황의 동선에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이로써, 교황청과의 냉전은 물론 그의 암흑기도 끝을 맺는다.
한편, 다시금 베르니니에게 가려져 그로 인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던 보로미니에게도 기회가 찾아오는데, 광장의 팜필리 궁전 옆, 산타녜세 인 아고네 성당(Sant'Agnese in Agone)의 재건축 결과, 정면 파사드를 높게 설계해 돔의 지붕이 가려지게 된 것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인노첸시오 10세는 이를 보로미니에게 맡겼고, 기다렸다는 듯 완벽한 파사드를 제작해 교황은 물론 베르니니에게 자신의 이름값을 똑똑히 증명하게 된다. 나보나 광장, 베르니니를 대변하는 Fontana dei Quattro Fium, 보로미니에 의해 완성된 Sant'Agnese in Agone의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성당과 분수는 마주하고 있었고, 책의 설명대로라면 '라플라타강의 신'은 성당 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정면을 보지 않고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형상이라 했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 내려가면 성당보다 분수가 먼저 완성되었기에 성립될 수 없는 얘기라는 전제가 꼬리표처럼 달려 있었지만, 나를 포함한 응집한 무리들은 분수와 성당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매달린 꼬리표 따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살과 뼈를 갈아 넣은 혼마당 앞에서도 누군가가 떠들어댄 그저 가십거리에 너도나도 목을 매고 있었다. 인노첸시오 10세를 사로잡은 특별함은 '생동감'이라 했다.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강의 신'의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자세를 새기듯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자의에 때론 타의에 의해 그렇게 라이벌이 된 그들 열정의 산물을 보고 있자니,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디딘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 광장은 제 본연의 무게로 짓눌러와 절로 숙연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