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의 시티 가이드와 도슨트 프로그램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의 시티 가이드와 도슨트 프로그램
강릉단오굿에서 악사가 바라지를 할 때 무악 연주와 함께 연행하는 구음에서 차용한 ‘에시자 오시자’. 의미 없는 구음으로 여겨질 수도, ‘하늘과 땅 위의 모든 존재를 초대한다’라는 뜻의 사설로 해석할 수도 있는 소리에 초대의 의미를 담아 환대하는 마음으로 조화의 장을 꾸린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바람과 구름, 옛이야기와 기억에 새겨진 풍경들, 산새와 들짐승, 이끼와 야생화, 보이지 않는 미생물, 스치는 눈발과 바람결에 실려오는 먼지, 대지를 어루만지는 그림자와 별빛, 그리고 그곳에서 탄생한 신화와 전설, 설화” - 등 대관령을 넘나드는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에 주목하여 그 걸음과 여정을 되짚고 대관령의 시간과 공간을 새로이 탐구하고자 하는 박소희 디렉터의 글을 읽고 강릉행 KTX 티켓을 끊었다.
클리셰적이지만, 결론부터 읊자면 미셸 드 세르토의 「도시에서 걷기」(Walking in the City) 가 머리속에서 맴도는 여정이었다. ‘장소’가 고정된 질서라면 ‘공간’은 그 것을 살아내는 행위를 통해 재구성된 결과라 이야기하는 드 세르토의 글처럼 보행자의 발걸음으로 다시 쓰이는 강릉은 ‘에시자, 오시자’를 통해 각각의 경험이자 공간으로 체화되며, 그 속에서 만난 새로운 이들과 다음을 기약하게 하는 플랫폼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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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 목요일을 택했다. 목요일에만 진행되는 키와림 작가님들의 워크숍에 참여하고 싶어서. 네이버지도나 구글맵에 표시 되지 않는 (구)함외과의원이나 일곱칸짜리 여관을, 도통 찾지 못할 길치는 시티 가이드와 도슨트 프로그램이 필수적으로 느껴졌다. 오전 열시 십분, 강릉역에서 출발하는 프로그램에 열시 조금 넘어 도착하는 기차를 타도 충분히 참여가능할지 묻는 문자에 기차시간을 고려하여 워크숍을 구성하였고, 편히 와도 된다는 운영진의 회신을 받았다. ‘환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시작이었다.
강릉역 역사에 걸린 김재현 작가의 <써클 트래킹>(2025)을 시작으로, 마치 자축하는 듯한 비비드한 색감의 깃발이 축제의 분위기를 물씬 살려주고 있음을 느꼈다. 강릉 출신인 작가는 성인이 되어 서울로 이주해 지내다 오랜만에 찾은 강릉 단오제에서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랐다고 한다. 산신제의 과정과 형식을 빌려 드러낸 현대적인 도상에서 작가의 어렸을 적 기억은 어땠는지, 그리고 토착민이면서도 이질적으로 느끼는 강릉은 어떠한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제의’, ‘상’, ‘신목 모시기’, ‘원’, ‘길’이라는 흐름 속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 서사를 구축했다고 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했다. 또, 가장 오른쪽의 깃에 소나무 길 한가운데, 산 옆, 짙은 남색과 보라색의 직사각 창이 병치된 산, 바다 옆 등의 강릉의 모습을 담은 공간적 변주, 화면 속 사람들의 리듬감이 푸르른 색감과 어우러져 돋보였다.
다음 전시장소로 이동하며 가이드 선생님은 투어 프로그램 예약이 거의 마감임을 말씀주시면서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셨다. 괜히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행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방문한 관객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곳. 긍정적인 에너지는 전염이 빠르다. 가이드 선생님께서는 강릉의 역사와 명소를 짚어주시며 당간지주를 확인하고, 이전 페스티벌 장소였던 동부시장도 방문하며 여러 질문에도 기분 좋게 답해주셨다. 부지런히 걷고 시간에 조금 쫓기는 듯 하면서도, 이 여정이 숨가쁘지 않았던 이유이다.
정연두 작가의 커미션작 <싱코페이션#5>가 전시되었던 옥천동 웨어하우스에서는 특히 짧은 시간 머물렀다. 3채널 비디오 설치와 항아리 설치로 이루어진 이번 작업은 작가가 단오제에서 마주한 풍경을 기반으로 인간의 염원과 자연으로 대치되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교차하는 순간을 병치하여 선보인다. 모내기를 하는 모습, 노을에 물든 하늘, 단오제의 풍경 등이 가운데 보이싱 작업을 거치지 않은 피아노 연주 영상과 함께 송출된다. 공간을 채우는 임지선 작곡가의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디아스포라’는 음소거된 강릉의 일상과 양간지풍이 휩쓴 산불 피해지역, 단오제의 영상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빠른 속주는 구급차 사이렌과 형형색색의 단오제 조형물을, 아르페지오는 느릿한 움직임을 노래한다. 인간의 염원이나 의지에 반하는 ‘자연’, 우리네 일상과는 대비되는 질서정연한 연주가 시사하는 바가 울림이 큰 작업이었다.
분주히 걸어 다음 전시 장소이자 워크숍 장소인 옛함외과의원에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강릉에서 설립된 최초의 병원 중 하나로 의료 불모지인 강원도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강릉 지역의 교육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역사적인 공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무 색이 따뜻한 적산가옥에 비치는 햇살이, 이해민선 작가와 키와림 작가의 오브제에 스며드는 것이 괜스레 더 따뜻했다. 또한, 함외과의원의 역사적 역할을 기반으로 ‘치유’를 다각적인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한 점이 돋보였다.
이번 전시는 함외과의원의 역사적 역할을 바탕으로 현대 예술을 통해 ‘치유’라는 개념을 다각적으로 탐구합니다. 병원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돌보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학문적 관점에서는 의사가, 전통적 관점에서는 세습무와 같은 주술적 존재가, 예술적 관점에서는 작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전시는 이러한 다층적인 치유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재조명하며, 현대 사회에서 치유 공간으로서의 함외과의원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예술적 표현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이 공간이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치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출처: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웹사이트
2층에는 이해민선 작가의 신작 <덜 굳은 사물> 시리즈와 <Feather Cuts>, <Duck, Drawn> 작품이 이러한 공간의 역사와 변화를 무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2022년 병원 두 곳에서 폐 깁스를 수거해 관찰하기 시작하여 작업한 <덜 굳은 사물> 시리즈는 어느 한 모서리에 서서, 굳다 만듯이 보이는 상아색 덩이를 보여준다. 폐깁스일지, 시간에 마모된 플라스틱 조각일지, 떨어져나간 조각덩이일지, 캔버스 화면에 우두커니 그려진 물체는 정체가 무엇일지보다 그 사물이 견뎌온 시간을 도리어 궁금하게 한다. 비주류나 가변적인 존재 그리고 연약함에 주목하는 작가의 <Feather Cuts>와 <Duck Drawn>는 이러한 ‘주변부’의 사물과 존재들의 변화나 상태, 시간과 관계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존재의 경계’, 기피하는 워딩이지만 이해민선 작가의 회화와 설치는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었는지, 내게 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사물이자 존재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경계를 확장한다. 작가는 디코이로 사용되는 오리의 모형과 진짜 오리의 모습을 소묘와 설치 작업으로 선보이며 인간중심적인 체계와 정형, 그 불완전함을 드러내며 자칫 중요하지 않다거나, 연약하다고 느껴지는 존재들 그 자체와 그들의 시간을 조망한다.
한 때 환자를 진찰하던 침대 위 놓인 작업과,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쪽에 붙여진 작업까지, 공간에 자연스레 녹아든 이해민선 작가의 작업들과 키와림 작가의 소리, 설치, 조형, 이미지 ,비디오, 텍스트 등 여러 매체로 자리한 작품은 우리 삶 속 필수불가결한 요소와 존재들, 그리고 이들이 맞물리며 자아내는 균형과 불협화음을 모두 내포한다. 특히 이렇게 다양한 ‘삶의 조각이 모여 형성하는 관계’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키와림 작가의 워크숍 <사물들> 덕분이었다 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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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및 텍스트 출처: 파마리서치재단 웹사이트(http://giartfestival.com/)
함께 읽으면 좋을 글:
de Certeau, Michel. “Walking in the City.” In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translated by Steven Rendall, 91–11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문소영 기자의 기사 “외국대사들까지 찾아온다…남다른 GIAF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중앙일보, 2025년 3월 23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2522